윤약국 약사 윤복순

일요일, 햇볕이 좋아 온몸으로 햇빛을 받을 수 있는 곳을 걷고 싶었다.  곰개나루에서 성당포구까지 걷기로 했다. 금강둑길이라서 경치도 좋을 뿐 아니라 겨울 철새도 만날 수 있다. 4대강 사업의 일환으로 강둑길은 자전거도로로 만들어졌다.

금강하구는 서산 천수만 주남저수지와 더불어 국내 최대 철새 도래지다. 겨울이면 가창오리, 청둥오리, 혹부리오리, 갈매기, 검은머리갈매기, 붉은부리갈매기 등 80여종의 겨울새들이 왔단다.

금강하구둑이 만들어지고 금강호가 생겼을 때 정말 철새가 많이 왔다. 물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까맣게 앉아 있었다. TV에서만 보았던 새들의 군무도 직접 보았다. 뭐라 표현할 말을 찾지 못해 감탄감탄만 했다.

언제부턴가 철새들이 줄었다. 2~3년 전에 왔을 때도 많이 보지 못했다. 오늘도 5시간 이상 걸었는데 하늘에 날아다니는 기러기와 강위에 떠있는 청둥오리 몇 마리가 전부다. 예방주사를 맞았기 때문이지 옛 생각을 하고 왔더라면 크게 당혹했을 것이다.

지구 온난화로 우리나라의 겨울 날씨가 따뜻해져서일까. 강과 주변의 환경오염으로 먹이가 부족해서일까. 4대강 사업으로 중장비의 굉음과 강변 따라 조성된 자전거도로가 철새들에게 위협이 되어서일까. 강변 곳곳의 준설로 서식지가 바뀌어서일까.

친정 동네에는 앞뒤 방죽이 있었다. 앞 방죽에는 물고기가 많았다. 모내기를 할 때면 방죽 물을 다 빼내어 논에 물을 대고 모를 심었다. 나는 여름 내내 그 방죽에서 살았다. 붕어도 잡고 우렁이도 잡고 강구도 잡고. 그러다 방죽에 물이 차면 얼씬도 안했다.

남동생이 자라고 나는 철이 조금 들었을 때라고 생각된다. 동생이 아주 멋진 곳을 보여 준다며 앞 방죽으로 데리고 갔다. 그곳은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다. 온 세상의 물오리가 다 모여 있었다. 손이 닿기만 하면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동생과 나는 그 물오리를 잡아 보기로 했다. 오리를 잡으려면 방죽에 들어가야 했는데 뾰족한 수가 없었다. 어머니 몰래 목욕다라이로 쓰던 빨간 고무 통을 들고 나왔다.

무서웠으나 고무 통을 띄우고 동생이 손바닥으로 노를 저었다. 앞으로 나가지 않았다. 나는 빨랫줄을 받치던 바지랑대를 갖다 주었다. 오리 곁에 근접할 수 있었으나 오리는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한 발 앞서 나아갔다.

약이 오른 동생이 자꾸만 방죽 안쪽으로 들어갔다. 나는 어서 나오라고 소리쳤고 동생은 말을 안 듣고 겁이 나서 그만 큰 소리로 울고 말았다. 내 고함소리에 놀란 동네 사람들이 방죽으로 모여 들었다.

그 날 나와 동생은 많이 혼났다. 아마 저녁도 굶겼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니 딸부자 집에 어떻게 얻은 아들인데, 그 아들이 방죽에 들어갔으니 아버지 어머니 속이 까맣게 탔을 것 같다.
연애시절 지금의 남편이 언제나 나를 집에까지 바래다주었다. 그 날도 앞 방죽에는 물오리가 쌍쌍으로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잡을 생각은 고사하고 오리의 사랑에 방해가 될까봐 방죽 둑에 죽은 듯이 앉아 있으면 전혀 우리를 의식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참 행복했다. 어쩌면 고무다라이 이야기도 했을 것이다.

십여 년 전 캄보디아 톤래삽 호수에서 수상가옥을 구경할 때다. 우리 배가 도착했을 때 수상가옥 근방의 아이들이 조그만 양은다라이를 타고 배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어찌나 위험해 보이던지. 한편으론 앞방죽의 고무 통 생각이 나서 남편과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음이 나왔다.

여행에서 돌아와 친정 동네의 방죽에 가 보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로 친정 갈 일이 별로 없었다. 앞 방죽에는 지금도 오리가 있을까. 시골에도 언제부턴가 지하수가 개발되고 방죽의 가치가 차츰 빛을 잃어갔다. 논에 농약을 치고 풀 약도 하면서부터 방죽에서 물고기 잡는 것도 시들해졌다고 했는데.

깊이 모를 맑은 물이 넘실대던 고향의 앞 방죽은 어디로 가고 농약병 비닐봉투 음료수깡통 등 생활 쓰레기만 득실거렸다. 송사리 각시붕어는 물론 우리의 데이트 비밀을 지켜주던 물오리의 흔적도 찾을 길이 없었다. 앞 방죽은 이미 역사가 되었고 돌아서는 발걸음이 무겁고 허망했었다.

금강은 장수의 뜬봉샘에서 발원해 천리를 굽이굽이 돌고 돌아 군산에서 바다와 만난다. 군산하구 둑과 웅포대교 사이 강변에 자리 잡은 갈대밭이 겨울 철새의 피신처가 되어 철새 도래지가 되었다.

그 갈대밭은 관광자원이 되어 보도블록이 깔리고 주민체육시설이 들어서고 영화 촬영지가 되었다. 둑길은 자전거 둘레길로 많은 이들이 씽씽 달린다. 주변의 논들은 추수가 끝나면 볏짚을 논바닥에 깔아 철새의 먹이가 되었는데, 지금은 모두 비닐로 싸서 소먹이로 판다고 한다. 이런저런 이유로 철새가 줄어 안타깝고 아쉬움이 있다.

철새가 생태계의 건강함을 나타내는 첫 번째 기준이라는데. 다행히 지자체에서 무논 조성과 볏짚 존치사업을 추진한다고 한다. 추수가 끝난 논에 물을 가두어 철새가 쉬고, 추수 후 낱알이 남아있는 볏짚을 깔아둬 철새의 먹이를 만들어 주는 일이란다. 잘되어 발길 돌린 겨울새들이 다시 돌아왔으면 좋겠다.

햇볕 좋은 겨울날 금강 변을 걸으면서 많은 철새들을 만날 수 있는 날이 빨리 돌아오길 기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