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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력을 걸며

윤복순 윤약국 약사

올해는 어떤 일이 생길까 기대와 설렘이 있다. 특별한 신년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평소 하던 대로 일요일이면 안 가본 곳으로 여행을 하고 틈틈이 책이나 읽을 생각이다. 천지만물의 이치에 통달하고 듣는 대로 모두 이해할 수 있다는 이순을 넘기고 보니, 거창한 계획보다는 험한 일이나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앞선다.

하루하루 건강하게 살아볼 참이다. 그러다 마음 내키는 일이 생기면 기꺼이 동참도 하면서. 성실하게 살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즐거움이 생기기도 할 것이다.

삼십 년도 훨씬 더 전이다. 그 때 나는 둘째 아이를 임신하고 이었다. 신년 계획을 ‘아들 낳고 논 사고’ 로 정했다. 먹을 갈아 붓으로 크게 써서 벽에 붙여 놓았다. 첫째가 딸이기에 아들을 바랬다.

그 때는 뭐가 그렇게도 자신만만했는지 모르겠다. 어떻게 아들을 내 마음대로 낳는다고. 그런데도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논도 샀다. 어리석게도 나는 계획을 세우면 다 이루어지는 줄 알았다. 그래서 해마다 신년계획이라는 것을 잘도 세웠다. 아이들이 어리고 남편이 초급장교 시절에는 그런대로 계획이 잘 들어맞았다.

아들이 대학에 진학하던 해다. 아들은 친한 친구가 서울로 가지 못한다며 아쉬워했다. 수능 점수로는 충분히 갈 수 있는데 가정 형편상 서울의 사립대는 어려워 지방의 국립대로 결정했다고 했다. 철딱서니 없는 아들은 친구의 부모가 무책임하단다.

아들은 돈 때문에 자식이 원하는 대학에 못 보내는 부모의 마음은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하고 싶은 것을 가족 때문에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을, 남을 위해 나를 희생해야 할 때도 있다는 것을 알기엔 아직 어렸을까?

나를 위해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우고, 내 가족만 생각하는 나의 평소 생활이 어느새 아들에게 그대로 전수되었던 모양이다. 생각해 보니 아이들을 데리고 어려운 곳을 찾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아니 그런 생각도 못했다. 이런 저런 곳을 구경시키고 체험시키기 위해 좋은 곳만 데리고 다녔다.

아이들에게 편식을 시킨 꼴이다. 어찌 육체에만 골고루 음식을 먹여야 하리. 정신도 균형 있게 섭취해야 한다는 생각은 왜 못 했을까. 그 해 계획을 그늘지고 어려운 곳을 애들과 같이 찾는 걸로 세웠다. 그러나 단 한 번도 가지 못했다.

당장 시아버지의 병환으로 일요일을 몽땅 병원에서 보내야만 했다. 시아버지는 뇌수술을 받았다. 수술 후 회복이 되지 않아 말도 못하고 먹지도 못해 주사기로 미음을 넣어줘야 했다. 대소변을 받아내는 것은 말 할 것도 없이 산소통까지 준비해 놓고 간호를 했다. 그런 생활이 3년 가까이 이어졌다. 시아버지는 물론 식구들도 모두 지쳐갔다.

나와 무관하게 계획이 어긋나기 시작했다. 사는 것이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해야했다. 나이를 먹으면서 삶이란 시대성, 사회성, 가족관계, 국제관계, 기후관계 등등 이런 저런 얽힘이라는 것을 알라간다.

이제는 아이들이 각자 가정을 이루고 살다보니 그 애들 일정에 맞춰야 하는 때가 더러 있다. 애들이 내려온다고 하면 나의 일요일 계획이 물거품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하루하루 잘 살고 여러 일이 겹치면 우선적 일을 먼저 하기로 했다.

어느 해인가는 우리 아파트에 이동도서관 차가 왔다. 격주로 계속 올 거라고 했다. 책은 3권씩 빌려줬다. 그 해 책 많이 읽었다. 계획에도 없던 행운을 잡았다. 다음 해 더 많은 책을 읽을 계획을 세웠는데 이동도서관 차가 다른 아파트로 가는 바람에 평년작도 못 되었다.

몇 년 전에는 마이산 종주를 하려고 이런 저런 준비를 다 해 놓았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예보와는 달리 눈이 소복이 쌓였다. 겨울산행의 어려움을 익히 알고 있던 터라 미련 없이 포기하고 미륵산까지 걸어가 보기로 했다.

논길 산길을 더듬어 처음 가보는 길이다. 아무도 걷지 않은 눈길위에 발자국을 찍는 나는 큰 횡재를 한 기분이었다. 그 날 30Km는 너끈히 걸었을 것이다. 계획에 없던 미륵산행인데도, 마이산을 못가 짜증이 나기는커녕 상쾌하기만 해 마구 자랑하고 싶었다.

작년에는 상상도 못했던 합창제의 무대에 서기도 했다. 결혼식 때 웨딩드레스 입어본 이후로 37년 만에 드레스를 다 입어 보았다. 당신 마누라 출세했다며 남편 앞에서 자랑도 했다. 이 모든 것들이 신년계획과는 전혀 무관하다.

1년은 고사하고 당장 하루 계획도 이런 저런 이유로 무산되는 경우가 있다. 하루하루가 특별한 날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육십 대의 삶이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즐기면서 하고, 행복하게 마무리 하는 지혜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뇌는 좋은 감정보다 익숙한 감정을 선호 한단다. 감정도 습관이기 때문에 행복한 감정을 기억하도록 노력해야겠다.

대접을 하면 대접을 받고, 사랑하면 사랑 받고, 미소를 지으면 웃음이 오고, 좋은 말을 하면 좋은 말을 듣고, 긍정적인 생각을 하면 좋은 일이 생긴다. 이 원칙은 어떤 사람도 어떤 나라도 벗어난 경우가 없다. 언젠가 읽었던 이 글귀가 떠올랐다.

올 해도 행복하고 건강할 것을 기대하며 달력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