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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을 희롱하며 노닐다

왕궁면장

채수훈

경남 함양군 남계천의 화림동 계곡은 함양 쪽에서 지리산 육십령 고개를 넘어 장수로 이어지는 국도와 철도 레일처럼 나란히 마주하고 있다. 화림동은 남덕유산에서 발원하는 금천이‘팔담팔정'을 이루어 예로부터 정자문화의 보고라 불렸다. 아내와 함양 하루여행의 하이라이트로 정자가 즐비한 화림동의 농월정, 동호정, 군자정 그리고 거연정을 찾았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풍류와 낭만의 공간이다. 오늘날에는 노곤하고 더위에 지친 여행객의 휴식처가 되었다. 이 정자들 특색은 계류에 면하여 훤히 드러나는 자리에 당당하게 자태를 뽐내고 있어, 차를 운전하면서도 쉽게 볼 수 있다.

달을 희롱하며 노닌다는 농월정(弄月亭)이 먼저 손짓을 하였다. 이 정자는 계곡이 넓게 S자 모양으로 굽어지는 소나무 숲 아래 풍광이 시원스러운 월연암에 자리하고 있다.

주차장에서 농월교를 지나 산길 건너에 있는 농월정에 올랐다. 조선 선조 때 지족당 박명부가 지은 정자이다. 팔작지붕이고 정면 3칸과 측면 2칸의 누각으로 추녀 네 귀에 활주를 세웠다. 그의 족적이 정자 오른쪽 바위에 ‘지족당장구지소’(지족당이 산책하던 곳)이라 한자로 새겨져 있다. 오늘날 핸드폰 인증 샷보다 더욱 강렬하였다.

농월정은 1637년에 최초로 지은 후 중수를 거듭한 끝에 1899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건립되었다. 2003년에 방화로 소실되었다가 2005년에 복원하였다. 현판은 명나라 사신 주지번이 쓴 글씨라 전해진다. 전주객사 ‘풍패지관’도 그의 글씨이다. 정자에 기문이 대여섯 개 걸려있었다. 옛 명성이 허튼소리가 아님이 실감 되었다.

조선 하륜은 <한벽루기>에서 “하나의 누정이 제대로 세워졌는가, 쓰러져 가는가를 보면 그 고을이 편안 한가 곤궁한가를 알 수 있다.”고 했다. 복원된 정자의 옛 정취는 사라졌고 문화재로서 가치는 반감되었지만 함양군의 온고지신의 마음이 느껴졌다.

달빛이 계곡물에 비추어 떠내려갈 때 풍경이 얼마나 아름다우면 정자 이름을 농월이라 했을까. 예로부터 인자는 산을 좋아하고 현자는 물을 좋아한다고 했다. 비록 보름달이 휘영청 밝아 물 위에 뜨는 야심한 밤은 아니지만 산자수려한 곳에 있으니 음풍농월이 따로 없다.
유홍준은 <나의 문화유산답기8>에서 “한국의 산천은 부드러운 곡선의 산자락이나 유유히 흘러가는 강변 한쪽에 정자가 하나 있음으로 해서 문화적 가치가 살아난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건물 그 자체뿐만 아니라 건물이 놓인 자리와 그곳에 정자를 세우고 즐긴 선조들의 마음까지 헤아린다면 자연을 누리는 즐거움을 온전히 함께할 수 있을 것이다.”고 했다.

농월정과 지족당. 역시 안빈낙도하는 선비들의 자연을 조감하는 눈썰미와 탁월한 자리 선택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역시 산천을 유람하는 것은 한권의 책을 읽는 것과 같다. 한편 농월정 계곡 건너편은 국민관광지로서 민박집, 음식점 등이 어수선하게 몰려있다. 계곡 산책로에 노후시설이 방치되어 있어서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농월정에서 바라본 계곡은 1천여 평 넓게 펼쳐진 올록볼록한 바위와 그 가운데로 흐르는 계곡물 소리로 시야를 더욱 밝게 비추어 주었다. 아내는 풍광을 즐기지도 않고 잽싸게 내려갔다. 때 이른 폭염 속에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족욕을 즐겼다. 정자에서 그 자연적인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자연에 사람이 동화되는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아내와 오던 길을 뒤로하고 계곡 물을 건너 지름길을 택했다. 계곡 끝에 다다를 무렵 아내가 바위에 낀 이끼를 밟고 물속에 빠졌다. 다행히 크게 다치지 않았고 신발과 바지가 좀 젖었다. 바로 옆 바위에서 노닐던 관광객 한 분이 오셔서 “이끼 있는 곳을 밟으면 위험하니까 조심하세요.”라고 위안을 준다. 이백은 뱃놀이를 즐기던 중 호수 위에 떠 있는 달을 잡으려다가 빠져 죽었다고 전한다. 아내가 달밤에 계곡물을 건너지 않아서 이백처럼 큰 봉변을 모면한 걸까. 다행스러웠다.

귀가 후 아내가 TV드라마 <환혼>을 시청하였다. 반가운 목소리로 “오늘 갔던 농월정 바위가 나온다.”고 했다. 농월정 너럭바위에서 촬영한 한 장면을 보았던 것이다. 아내와 24년간 전국 역사문화여행을 다녔는데 그런 표현은 처음이었다. 길치라서 동문서답을 잘했는데 이번만은 믿고 싶었다. 역시 농월정의 경치는 직접 찾아가 보지 못한 사람과 그 느낌이 사뭇 다른 것 같다. 달아달아 밝은 달아, 농월정에서 놀던 달아. 한평생 몇 번이나 둥근 달 볼까? 맑은 바람을 읊고 밝은 달을 즐기기 위해서 야심한 달밤에 술 한 병 가지고 찾아가 봐야겠다. 그 느낌이 어떨까 벌써부터 가슴이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