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익산시민 유 성 무
말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구화지문(口禍之門)이란 사자성어가 지면에 등장한다. 이 말은 중국 당나라 몰락 후 송나라가 들어설 때까지의 혼란기였던 5대10국시대를 살다간 정치가 풍도(馮道)가 쓴 <설(舌)>이라는 시(이하 설시(舌詩))에서 유래됐다. “입은 화의 문이고 혀는 몸을 베는 칼이니, 입을 다물고 혀를 깊이 간직하면 몸이 어디에 있든지 편안하리라.(口是禍之門 舌是斬身刀 閉口深藏舌 安身處處牢)” 구화지문은 보통 말을 조심하라는 뜻으로 쓰인다. 풍도의 설시는 고려 말에 지어진 <명심보감>과 불교 입문서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에서도 비슷한 표현으로 등장했다. 설시가 우리 역사에 가장 극적으로 다가온 것은 조선조 연산군 때였다. 연산군은 자신에게 간언하는 내시들에게 설시를 새긴 패를 목에 걸도록 했는데, 나중에는 중신들까지 이 패를 차도록 했다.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하면 목숨을 잃게 될 것이라는 세련된 협박이었으니, 이 패가 바로 그 유명한 신언패(愼言牌)다. 풍도의 설시는 시대를 거치면서 입을 다스려서 마찰을 피함으로써 몸을 지키는 처세술의 금과옥조가 됐다. 더 나가서 어지러운 때 침묵과 방관으로 일신의 안위를 꾀함을 정당화시키는 수단으로 전락했다. 그는 과연 어떤 마음으로 설시를 읊었을까? 풍도의 삶을 살펴보고 그가 설시를 통해서 진짜 말하고자 한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가 설시의 교훈을 곡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고자 한다. 풍도는 다섯 왕조의 왕 11명을 겪으면서 50년 관직생활 중 20년 이상을 재상으로 살았던 유례를 찾기 힘든 인물이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자고 일어나면 왕조와 왕이 바뀌는 혼돈의 시기였다. 이런 시대에서 단지 입 다물고 세태에 몸을 맡기는 절묘한 처세술만으로 유례없는 난세에 20년 동안 재상의 자리에 머물 수 있었을까? 결단코 아닐 것이다. 이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풍도의 삶을 더 살펴보자. 풍도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극과 극으로 갈린다. 한쪽에서는 그가 국가에 대한 충(忠)을 버린 채 권력만을 바라본 기회주의자라고 평가한다. 그가 때로 망해가는 왕조에 반기를 들기도 했고, 흥하는 왕조와 정치적 거래를 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다른 쪽에서는 그가 혼란한 시대를 살면서 국가에 대한 지조보다는 고단한 삶에 지친 백성들의 편안함을 추구한 현실주의자라고 평가한다. 왕조와 권력의 빈번한 교체기에서 허울뿐인 충성보다 민생안정을 도모할 강력한 권력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극단적으로 엇갈리는 평가 속에서도 풍도의 행적만큼은 모두 인정하고 있다. 풍도는 근검하고 청렴한 사람이었다. 뇌물과 청탁을 물리쳐서 집안은 빈한하였으면서도 항사 어려운 백성들에게 가진 것을 베풀었던 청백리였다. 뛰어난 재주를 지녔음에도 예를 다함에 모자람이 없었고, 자애로운 성품으로 남과 싸우지 않은 사람이었다. 즉 한평생을 극도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살면서 국가관은 없었을망정, 백성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는 관리로서의 사명감만큼은 투철한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그가 말년에 “나는 나라를 섬겼을 뿐 왕을 섬기지 않았다”라고 한 말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그에게 나라는 왕조가 아니라 오로지 백성이었다. 풍도는 초야에 숨어서 공맹의 도나 읊조리는 작은 선비가 아니었다. 난세의 권력 세계에서 목숨을 걸고 자신의 이상을 펼친 현실정치가였다. 그는 나라가 다섯 번 바뀌고 열 한 명의 왕을 거치면서 20년 이상을 권력의 핵심에 있었다. 그런 그가 껄끄러운 상황에서는 입을 다물면서 권력의 눈치나 보면서 자리를 지켜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랬다면 간신배로 몰려 숙청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오히려 그가 백성의 안위만을 위해 치열한 정치활동을 했다고 봄이 타당하다. 풍도의 행적을 미루어보건대, 그는 불편부당한 자세로 사리사욕을 떠나서 올바르면서도 합리적인 주장을 강하게 펼쳤을 것이다. 다만 그는 위민의 진심만을 담았을 것이고, 합리적이고 절제된 표현으로 불필요한 정치적 마찰을 막았을 것이다. 당연히 그를 따르는 관리들과 백성들의 신망이 두터웠을 것이니, 새로운 왕조와 왕에게 정권의 안정을 도모함에 있어서 풍도와의 관계구축이 필요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이 그가 난세를 헤쳐 나갈 수 있었던 진정한 힘이 아니었겠는가! 풍도의 파란만장한 삶을 살펴볼 때, 설시는 재해석 되어야 한다. 단순히 말을 조심하고 나서지 말라는 소극적 의미가 아니다. 지도층이라면 마땅히 천하의 안위를 말하고 이를 철저하게 실천할 때, 비로소 천하가 편안해질 수 있음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이리라. 지도층의 입은 복이 나오는 문이 돼야 하고, 혀는 천하의 불의를 자르는 칼이 돼야 함을 강조한 것은 아닐까? 대정치가 풍도의 깊은 뜻이 가벼운 자들의 말실수를 꾸짖고 비겁한 침묵을 정당화하는데 오용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