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시민 유 성 무

개인적으로 지난 4.13 총선의 야권 승리로 뭔가 참신한 변혁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다만 최소한 현 정부와 여권의 독주를 막고, 난마처럼 얽힌 국정을 야권이 조금씩 풀어나갈 수 있는 계기 정도는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런데 20대 국회 개원 후 2달이 다 돼가는 지금 이런 소박한 기대마저 무너지는 것을 느낀다.

내 기억으로 최근 20년 동안 우리나라가 비상시국이 아니었던 때가 없었던 것 같다. 김대중 및 노무현 정부에서는 외환 위기와 북핵 위기 등으로 나라가 흔들렸다. 이명박 정부에서는 대북관계 악화와 국고 탕진, 국가기강 와해로 헬 조선의 문이 열렸고, 박근혜 정부에 들어서는 세계 질서가 요동치는 가운데 전방위적으로 비상시국이 전개되고 있다.

이미 국민들은 4.13 총선을 통해 현 정부와 여권이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국가적 비상사태를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야권 특히 원내 제1당이 된 더불어민주당이 그들의 총선 각오처럼 국정 변혁에 나서기를 바란 것이다. 나가서 다른 야당들과 협력하여 정권 교체를 이룸으로써 국가 안보와 경제 안정, 민주사회의 정착을 요구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선 이후 지금까지 더민주당이 보여준 모습은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도대체 존재하는지 조차도 의심스럽다. 총선 이후 부각된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 문제, 옥시 가습기 첨가제 사태, 정운호 게이트와 법조 비리, 롯데그룹 비자금 및 정경 유착 의혹, 기업부실 해결문제, 전 청와대 홍보수석의 언론통제 의혹, 비정규직 문제, 복지 지출 문제, 최저임금 갈등, 핵발전소 추가 건설, 남북 갈등 격화, 사드 배치 결정 등 주요 사안에 대해 제대로 된 목소리 하나 내지 못하고 있다. 더민주당의 정체성과 지향점을 도무지 알 길이 없다.

무기력했던 19대 국회 때의 모습과 당의 내부 갈등이 수면 아래로 잠긴 것 외에는 뭐 하나 달라진 것이 없다. 더민주당의 현재 태도를 좋게 해석한다면 대여 투쟁에 대한 부담감, 갑론을박으로 시끄러운 모습을 보임으로써 생길 수 있는 대중의 비판, 일부 언론들의 종북몰이에 대한 경계 등을 고려한 전략적 선택이라고 하겠다. 하지만 보통사람의 입장에서는 무소신과 무능, 무책임과 보신주의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입 다물고 있으면 중간은 할 수 있다는 것인지....

더민주당이 차기 정권을 목적으로 한다면 지금과 같은 태도로는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정권이 교체된다고 전 정권으로부터 물려받은 문제가 저절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정권에서 책임지고 이를 해결하는 것이 당연하다. 여야를 떠나서 정치권은 모두 현 상태에 대해 연대책임을 지는 것이다. 따라서 진정으로 수권의지가 있다면 지금 당장 문제를 수습함으로써 사태가 악화되는 것을 결사적으로 막아야 한다. 하지만 지금 더민주당에게 이런 결기는 고사하고 전략적 시의성조차 찾아볼 수 없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국민적 저항으로 거저 얻은 야권의 총선 승리가 더민주당의 정권 교체로 이어질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가? 대선은 총선과 그 성격이 확연히 다르다. 대선에서는 정치적 이념, 지연, 혈연, 학연은 말할 것도 없고, 경제적 이해관계와 세대 사이의 가치관이 첨예하게 나뉘어져서 부딪친다. 하다못해 종교까지 끼어드는 판이 대선이다. 대선은 옳은 것이 이기는 것이 아니라, 강한 것이 이기는 게임이다. 따라서 더민주당을 비롯한 진보 세력이 정권을 잡으려면 강한 의제를 개발하고 선점해서 지속적으로 국민들을 설득해야 한다. 단지 현 정부와 여당의 난정을 비판하는 것만으로는 뿌리 깊은 보수 세력을 이길 수 없음이 지난 두 번의 대선을 통해 확인됐다.

문득 최초로 수평적 정권 교체를 이뤄낸 김대중 대통령과 온갖 역경을 극복하고 정권을 잡은 노무현 대통령이 지금의 더민주당에 있다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하는 생각이 떠오른다. 그들은 우리가 처한 현실을 냉철하게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하면서, 난국 타개를 위해 온 국민이 함께 하자고 열정적으로 소리 내지 않았을까? ‘행동하는 양심’과 ‘더불어 사는 따뜻한 세상’을 앞장서서 외치면서 깨어있는 시민들의 동참을 호소하지 않았을까? 불의와 비상식에 대해 침묵하지 않고 저항한 그들의 신념 때문에 우리가 비록 충분하지는 않지만 민주사회를 경험했다고 생각된다.

비록 호남에서는 국민의당에게 4.13 총선에서 완패했지만, 더민주당은 여전히 120석이 넘는 의석과 유력한 대권주자들을 보유하고 있는 야당의 중추다. 옳지 못한 것을 바로잡는 것이라면, 당내에서 시끄러운 것에 대해 두려워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본디 시끄러운 것이 민주주의의 특질이며, 의회민주주의를 채택해서 국회의원을 뽑는 이유가 특정계층의 사익이 아니라 국익과 보편적 정의를 위해 치열하게 싸우라는 것이 아니던가! 그런데 왜 목소리 한 번 제대로 내지 않고 있는지 참으로 알 수 없다. 당권과 공천권을 놓고는 그토록 시끄럽더니 말이다.

나라가 더 이상 망가지면 어느 정당이 집권해도 수습하기 힘들게 된다. 지금이라도 더민주당은 국민의당, 정의당과 함께 현 정권과 여당을 강력하게 견제하고 협력하면서 국가적 난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더민주당은 국민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아야 한다. 그것이 정권 교체의 유일한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