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복순 윤약국약사

애들이 내려온다고 해 방방마다 청소를 하고 제습기를 돌렸다. 윤아, 현아가 말 짓을 해 손이 닿을만한 곳에 있는 것들은 모두 책상위로 올려놓고 전화기의 선도 뽑아 문갑 속에 넣었다. 종이가방을 들고 망설이다 장식장속에 넣어뒀다.

남편 생일을 맞아 애들이 내려왔다. 쌍둥이들은 지금도 낯을 가려 집에 들어서자마자 울기 시작한다. 두 돌이 가까워 오는데 워낙 미숙아로 태어나 성장률이 윤아는 백 명 중 구십오등, 현아는 겨우 오십등에 턱걸이 한다. 자박자박 걷고 아빠, 엄마, 언니 말을 하고 또 말은 다 알아 듣는다.

자라는 것이 신통해 안아주고 싶어도 볼을 비비고 싶어도 영 붙여주질 않는다. 요거트를 들고 “이리와 이것 먹게.” 어르고 달래도 빤히 쳐다보다 앵 하고 운다. 오빠 언니들과 놀다가도 내가 가면 저희 엄마한테로 그냥 가 버린다.

민정이 민희는 나를 따라 다니며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조잘조잘 풀어 놓는다. 인삼주, 더덕주, 산삼주 등이 담긴 병들이 나란히 있는 것을 본 민정이가 “할머니, 왜 인삼을 가둬 놓았어요?” 묻는다. 민정이가 책을 많이 읽을 수 있도록 신경써줘야겠다.

초등학교 4학년, 1학년, 유치원생인 큰 것 들은 글씨를 알면서 부터는 집에 올 때 마다 편지를 써 온다.

‘사랑하는 외할아버지께. 사랑해요. 건강해요. 행복하세요. 생일 축하들려요. 민희 올림.’ 편지 밑에 민희와 외할아버지가 손을 번쩍 들고 있는 그림을 그렸다. 유치원생인 민희는 아직 한글을 다 익히지 못했다.

‘민정이가 사랑하는 외할아버지에게. 진짜 사랑해요. 오래오래 사세요. 건강 하세요 그리고 행복하세요. 우리에게 포도를 주셔서 우리들이 행복해요. 포도가 자라면 또 주세요. 외할아버지 멋있어요. 답장 주세요. 그림은 뒤에 있어요.’ 예쁜 양을 그려 놓았다.

‘외할아버지께. 외할아버지 안녕하세요? 저 해성이에요. 포도 키우시느라 힘드시죠? 앞으로 저희가 많이 가서 도와드릴 게요. 2학년 때 중국에 데리고 가 주신 것 정말 감사해요. 건강하세요. 해성올림.’

이런 쪽지 편지들이다. 내 생일 때는 외할머니 사랑해요로 시작하는 편지를 써서 가지고 온다. 생일이 아닌 때는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사랑해요로 쓴다. 받침이 틀리고, 조사가 잘못 붙고, 글씨가 크고 작고, 줄이 잘 맞지 않아 읽을 때 애로사항이 있지만 그 만큼 귀엽고 사랑스럽다.

애들이 차례로 남편 앞에 서서 자기의 편지를 읽고 할아버지한테 뽀뽀를 하고 편지를 준다. 나는 이런 편지들을 ‘천사들의 편지’ 라고 쓴 종이가방에 넣어 잘 간수하고 있다.

아이스크림케이크에 불을 붙이고 민정이가 방과 후 학습시간에 배운 우쿨렐레를 연주하고 딸네 다섯 아이들이 한 줄로 서서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른다. 쌍둥이들도 손뼉을 치며 한 몫을 한다. 딸이 키우느라 고생은 하지만 참 보기 좋다. 어느 천사가 이보다 더 예쁠까.

아이스크림을 조금 떼어 윤아 입에 넣어 주었다. 한참을 쳐다보더니 울지 않고 먹는다. 현아에게도 주니 입을 벌린다. 이렇게 조금씩 낯을 익히고 친해질 것이다. 원래 손녀와 외할머니는 기가 막힌 사이가 아니던가.

아침을 먹고 장항에 있는 송림산림욕장에 갔다. 이곳은 군사지역이었던 곳을 개방해 소나무가 잘 보존돼 걷기에도 좋을 뿐 아니라 바로 바다라 갯벌 체험도 쉽게 할 수 있다. 더 명물은 스카이워크다. 하늘 위에서 바닷가를 걸을 수 있다.

해변가에서 해성이가 윤아 손을 잡고 민정이가 현아 손을 잡고 걸었다. 민희가 저만 애기 손을 못 잡아 준다고 울고 야단이다. “민희야 그럼 엄마가 애기 하나 더 낳아야 되냐?” 어느새 민희가 울음을 그치고 내 손을 잡는다.

시간이 지났고 양파링을 먹는데 아이들이 안경을 만든다. 눈에다, 볼에다, 머리위에다, 다섯 명이 제 각각이다. 스냅사진을 몇 장 찍었다. 아버지는 “거지가 밥 얻어다 놓고 자식 보고 웃는다”고 했다. 그 마음이 백 번 이해가 되는 시간이다.

목이 마르단다. 수박이며 포도는 차 안에 있는데. 사위가 차 있는 데로 빨리 가고 민정이 민희도 따라갔다. 해성이가 끝까지 윤아를 데리고 온다. 역시 큰 놈은 큰놈이다. 내가 윤아를 안으니 많이 걸어 다리가 아픈지 울지 않는다.

차 안에서 확실하게 눈에 익히기 위해 수박을 주니 쌍둥이들도 목이 말랐는지 잘 받아먹을 뿐 아니라 웃기도 한다. 이만하면 많이 친해졌다.

애들이 가겠단다. 갈 때도 차례로 서서 남편과 나에게 뽀뽀를 하고 안아주고 또 온다고 인사를 하고 손을 흔든다. 오빠 언니들이 그렇게 해서인지 윤아, 현아도 뽀뽀를 해 줬다. 대단한 발전인데 정들자 이별이라고 이렇게 가니 다음에 만날 때 또 울지 않을지 모르겠다.

애들은 다음에 올 때 장항에서 있었던 일을, 학교생활을, 외갓집에서의 일을 편지로 써 올 것이다. 천사들의 편지가 스무 장이 넘었다. 해가 가면 윤아도 현아도 편지를 써 올 것이다. 내 재산이 자꾸자꾸 늘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