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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승의 노잣돈

이리자선원장 · 전북노숙인복지시설협회장

성산 김 영 주(도영)

‘생태건축’으로 잘 알려진 故 정기용 건축가는 2012년 상영되었던 <말하는 건축가>에서 자신의 죽음관을 밝힌다. “나이가 들수록 철학 공부를 해야 되는 것 같다. 죽음에 대한 준비는 단단히 해야 한다. 옛것을 추억하고 눈물을 흘리는 그런 것이 아니라, 산다는 게 무엇인지, 나는 누구인지, 어떻게 살았는지, 세상은 무엇인지 하는 근원적인 문제들을 곱씹어 보고, 생각하고, 그러면서 성숙한 상태로 죽는 게 좋겠다.” 하였다.

오랫동안 인류는 죽음에 대해 궁금해 여겨왔다. 많은 철학자들이 죽음을 사유해 왔고, 종교는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죽음 이후의 세계에 언급했다. 죽었던 사람 중 몇 명만이라도 세월이 한 참 후에 나타나 “내가 죽어보니 이러저러 하더라”고 말해 주었었다면 궁금증이 풀렸을 텐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위대한 성자들의 혜안을 통해 나타난 죽음관(또는 眞理觀)을 통해서 죽음 이후를 엿볼 수 있고, 필자 또한 그 말씀을 믿고 40여년의 세월에 걸쳐 고민해 온 深思에 바탕하여 앞으로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왜냐하면 인류의 스승인 성자들의 말씀은 거짓이 없기 때문이다.

죽음의 세계는 우리 영혼의 고향이다. 고향이지만 왠지 낯설고 생소해서 두렵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곳에 가지 않는 사람은 없다. 지위가 있거나 없거나 돈이 많거나 적거나 차별 없이 모두 그 고향에 다녀와야 하는 곳이다. 그러나 저승의 세계 즉 우리 영혼의 고향은 그냥 가면 찾아가지 못한다. 그러면 어떻게 가는가? 저승은 정신적 노잣돈만을 허용하고 있다. 이 노잣돈을 얼마나 가져가느냐에 따라 고향을 잘 다녀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려면 노잣돈을 많이 마련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 노잣돈 무엇이냐?

첫째는 진리에 대한 믿음(信心)의 노잣돈이다. 이 믿는 마음은 영혼의 고향에 갔다가 다시 돌아올 때의 노잣돈이다. 이 비용이 없으면 다시 돌아 올 수가 없다. 제가 정신요양시설에 있을 때 박 모 씨라는 생활인이 있었다. 정신질환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약을 성실히 복용하여 거의 정성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명절에 고향집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을 몰라 산속도 헤매고 거리에서도 헤매고 결국은 경찰의 도움으로 돌아올 수가 있었다. 집에 있는 동안 약을 먹지 않아 정신이 안갯속과 같은 혼몽 상태에 빠져 버린 것이다. 정산종사께서는 “믿음이 있으면 혼자 힘으로 저승에 갈 힘이 없더라도 믿음을 통해 진리에 의지하고 불보살들의 힘에 의해 갈 수 있다.”고 하셨다. 불생불멸과 인과보응의 진리에 대한 확실한 믿음만이 저승에서 다시 우리 곁에 올 수가 있는 것이다.

둘째는 참회(懺悔)의 노잣돈이다. 참회는 저승길을 아주 개운하게 다녀오는 노잣돈이다. 아주 기분이 좋고 즐겁게 다녀오는 비용이다. 무언가 찌꺼기가 남아 있으면 찝찝하다. 방안 청소를 해도 개운하게 청소를 하면 기분이 좋지만 대충하고 보면 왠지 개운하지가 않다. 정리정돈을 잘하고 저승길에 가야 개운하게 다녀올 수 있는 것이다. 살아생전에 남하고 정리하지 못한 게 있으면 안 된다. 깨끗이 정리해야 한다. 물질뿐만이 아니다. 이웃과 서로 억울하거나 원한이 있어 그것을 가지고 가면 안 된다. 내 양심에 부끄러움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셋째는 서원(誓願)의 노잣돈이다. 서원은 저승길에 밝혀줄 등불의 비용이다. 저승길은 안개처럼 자욱하여 등불이 없으면 갈 수가 없다. 살아생전에 저승길의 길을 잘 알아 놓아야 한다. 그 길을 알아놓으면 내 마음을 편안하다. 왜냐하면 남들보다 빨리 또는 정확히 다녀올 수 있기 때문이다. 길을 잘 모르면 다녀올 때 더딜 수밖에 없다.

전라남도 영광에 “멍바우 장에 간다.”는 속담이 있다. 하루는 주인 영감이 멍바우에게 말했다. “내일은 장에 다녀오너라.” 다음 날 멍바우는 하루 종일 보이지 않다가 해질녘에 나타났다. 주인 영감은 멍바우를 보자 한 마디 했다. “가라는 장에는 안 가고 온종일 어디를 갔다 오는 것이냐?” “장에 가라고 하셔서 두엄 지고 장에 갔다 옵니다.”

주인 영감이 하도 어이가 없어 이렇게 말했다. “장에 가려면 목적이 있어야 하는 것인데 쓸 데 없는 두엄만 지고 덜렁덜렁 갔다 오면 어떻게 하느냐? 너같이 멍청한 놈이 어디 있을까!” 주인 영감이 나무 방망이를 하나 깎아 허리춤에 채워 주면서 말을 했다. “이 방망이를 너보다 멍청한 놈을 만나거든 채워 주거라.”

그 후 세월이 흘러 주인 영감의 병이 위중해서 집안 공기가 심각해졌다. 멍바우는 주인 영감이 많이 편찮으시니 가시기 전에 한 번 뵙고 싶었다. 그래서 가족들에게 청을 하여 허락을 받고 들어가서 주인 영감께 인사를 드리니 주인 영감이 말씀을 하셨다. “이제는 떠날 때가 되어 가려한다.” 멍바우가 여쭈었다. “가시면 어디로 가십니까?” 주인 영감이 멍바우의 말을 듣고 생각해 보니 대체 자기가 떠난다고만 했지 황천(荒天)이니 저승이니 하는 것이 막연하고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잘 모르겠구나.” “가시면 언제 가십니까?” “그것도 잘 모르겠다.” “그러면 영감님께서 가시면 언제 오십니까?” 주인 영감은 아무리 생각해도 올 날을 알 수 없었다. “그것도 잘 모르겠구나.”

멍바우는 주인 영감을 향해 말씀을 올렸다. “저는 멍청해도 가는 곳이 분명했고 돌아올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런데 주인 영감님께서는 갈 곳도 모르고 갈 때도 또 돌아오실 때도 모르십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 멍청이 방망이는 주인 영감님께서 차셔야겠습니다.” 말이 끝난 멍바우는 방망이를 풀어 주인 영감께 돌려주었다고 한다.

사실, 이 멍바우 몽둥이는 멍바우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 할 것 없이 다 차고 있다. 인도의 석가모니도 본인이 차고 있는 멍바위 몽둥이를 벗어 버리기 위해 장차 제왕의 자리도 던져버리고 성을 넘어 설산에서 6년의 고행의 끝에 신비에 가려진 미지의 세계가 영혼의 고향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저승은 미지의 세계로 가는 것이고, 완전히 이 세상에서 떠나는 것이 아니라 떠나온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죽음이 인생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며, 돌도 돌아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는 것을 이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