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좀 풀리면서 남편이 일주일 넘게 포도나무 가지치기를 했다. 그 가지를 중간 중간 모아놓았다 갈아서 밭에 뿌린다. 가는 것은 기계로 하는데 그  값이 비싸 임대해서 쓴다. 파쇄작업까지 해야 가지치기가 끝난다.

  우리는 트럭이 없어 다른 집이 빌려온 것을 같이 쓴다. A아저씨가 애들이 쉬는 일요일에 일을 하는데, 토 일은 임대해 주는 업체(시청소속)가 쉬는 관계로 금요일 오후에 기계를 빌려 왔다.
 그래서 토요일 남편이 그 기계를 썼다. 일꾼을 얻어 저녁 늦게까지 했지만  다 못했다. 일요일 아침 8시 30분에 기계를 가지러 온다고 해 잠깐이라도 내가 거들어 주겠다고 꼭두새벽에 나섰다.

 남편이 기계 속에 포도가지를 넣기 쉽게 일정량씩 집어주는 일을 내가 맡았다. 한 사람은 가지를 1회 분량씩 만들고, 다른 사람은 그걸 가지고 가 때 맞춰 기계 속에 넣어주고, 또 다른 사람은 기계를 운전해 가면서 분쇄하는 속도를 조절한다. 이렇게 3인1조가 되어야 일이 착착 진행된다.

  남편과 둘이 하려니, 거기다 나는 완전 초보 일꾼이니 미처 파쇄기의 먹이를 만들지 못해 기계가 노는 시간이 더 많았다. 진도가 영 나가지 않았다. 겨우 한 동을 끝냈을 때 약속시간이 되었고 정확하게 기계를 가지러 왔다.

  기계를 가져가면서, 하루 종일 걸리지는 않을 것 같으니 끝나는 대로 연락을 주겠단다. 기계는 월요일 오전 8시 까지 갖다 주면 된다.
새벽 일찍 나가느라 아침식사도 못했는데 집에 가서 밥도 먹고 좀 쉬었다 와야 하나, 가까운 청운사까지 걷다가 점심을 사 먹고 연락이 오면 기계를 받아야 하나 머릿속이 복잡했다.

  나는 돼지감자나 캐자고 했다. 많지는 않지만 무엇이 바빴는지 지금까지 캐지 못했다. 남편은 그 집에 가서 일을 도와주자고 했다. 그러면 그 집 일이 빨리 끝날 수 있고, 그 사이 나도 조금은 요령을 터득해 오후 일이 수월할 것이라며. 남편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그 집도 아저씨 아주머니와 사위가 하고 있는데, 사위는 나와 동급으로 일이 서툴 뿐만 아니라 요령을 몰라 기계가 공회전만 하고 있다. 얼른 남편이 아저씨와 손을 맞추고 사위와 아주머니가 보조자로 나섰다. 나는 갈아져 나오는 줄기를 포도나무에 거름이 될 수 있게 이리저리 갈퀴로 흩어 놓았다.

서너 시쯤 끝날 것 같다고 했는데 2시가 조금 못되어 끝났다. 점심까지 얻어먹었다. 잠시 쉼도 없이 우리 밭으로 왔다. 아저씨가 우리 일을 같이 하겠단다. 우리야 그 집 일이 빨리 끝나야 한 동이라도 더 할 수 있으니 최선을 다 했지만, 아저씨도 어떻게든 우리 일까지 끝내줄 생각으로 안 쉬고 계속했다며 서둘러서 오늘 끝내자고 한다.

 둘이 할 일을 셋이 하고, 더구나 아저씨는 일등 일꾼이니 신바람 나게 일이 돌아갔다. 남편하고 둘이서만 했다면 하루 종일 걸릴 일이 5시 조금 넘어서 마쳐졌다.

 하우스 40동 중 8동이 남아 똥 싸고 밑 안 닦은 것 같았는데, 더구나 바로 설로 이어져 한동안 일을 할 수 없었는데, 다시 기계를 빌리려면 트럭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야 했는데, 이렇게 다 마치고 나니 홀가분하고 뿌듯했다. 단순한 육체노동이 몸은 힘들어도 머리는 맑게 하는 재주가 있는 것 같다.

  기계 빌린 값을 우리가 다 내자고 했더니 남편도 그럴 생각이었단다. 우리는 트럭이 없어 기계를 실어 올 수도 없고, A아저씨가 아니었으면 이렇게 쉽게 끝내지도 못 했고, 아저씨네는 한 나절 밖에 사용하지 않았으니 여러모로 그래야 마땅했다. 아저씨는 돈 가지고 이러면 내년부터 우리랑 같이 기계 빌리지 않겠다며 기어이 하루 값은 당신이 냈다.

 우리 속담에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는 말이 있다. 두어 달 전 쯤 동네 성(兄)이 우산을 사러 가는 중이라며 약국에 들렀다. 우산 같은 것을 왜 사냐며 제약회사에서 받은 골프 우산을 드렸다. 그 일이 있고 이틀 뒤 누가 놓고 갔는지 문 닫을 때 보니 우산이 두 개나 있다.

 일주일 전이다. 아파트 아주머니가 컴퓨터로 프린트 좀 했으면 좋겠단다. 문방구에 컴퓨터가 없어 못했다며 좀 급한 거라고 했다. 나는 겨우 내 소용되는 것만 할 줄 아니 안으로 들어와서 하라고 했다.

 몇 장 안 되는 줄 알았는데 20장이 넘었다. A4 용지 값이라며 돈을 준다. ‘앉은 자리 풀도 안 나겠다.’며 어서 넣으라고 했다. 용지는 이면지로 모두 남들이 준 것이다. 그냥 버리기 아까워 활용 한다고 하니 아름아름 갖다 준 것들이다.

며칠 뒤 아주머니의 시동생이 A4용지 2500매 한 박스를 가지고 왔다. 모 회사에 다니는데 사무실에서 나온 이면지로 한 쪽에 굵은 줄이 두 개 들어 있다. 너무 많아 필요한 사람과 나눠 써야겠다.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의 원래 뜻은 남에게 조금 해를 주었다가 되레 자신이 크게 손해를 입는다는 부정적인 의미다. 나는 이를 긍정적으로 바꾸어 본다. 그냥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인데 몇 배의 감동으로 돌아왔다. 이 감동이 삶을 풍성하고 윤택하고 따뜻하게 해준다. 이런 소소한 것들이 나를 웃게 만들고 감사하며 긍정적으로 살게 하는 원동력이다.

 포도밭에 아직 찬바람이 있지만 잘린 가지에 가만히 코를 대보니 싸한 봄기운이 바로 옆까지 왔음이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