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시민  유 성 무

초한연의(楚漢演義)는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만큼 웅장한 역사소설이다.  이 중국 고대소설들은 난세를 딛고 패업을 이룬 영웅호걸들의 흥망성쇠를 담고 있다.  실제 역사에 기초한 이 소설들은 인간사의 거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대서사시라고 평가된다.  초한지를 통해서 승자의 조건을 소통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보려고 한다.
 

초한지는 항우와 유방의 일대기를 그리고 있다.  명문거족의 후예로서 뛰어난 무용을 자랑하는 항우는 승승장구한다.  반면에 미천한 시골 출신 유방은 항우에 줄곧 눌려서 납작 엎드렸다가 해하 싸움에서 승리하고 한나라를 창업한다.  모든 면에서 압도적이었던 항우는 왜 유방에게 패했을까?  해하에서 대패한 항우는 죽기 전에 해하가라는 유명한 시를 남기는데, 앞 두 구절은 다음과 같다.  “힘은 산을 뽑을 만하고 기운은 세상을 덮을 만하나, 때와 운이 불리하니 추 또한 달리지 못하는구나.(力拔山氣蓋世 時不利兮추不逝)”  항우는 자신의 패배를 시운(時運)으로 돌렸다. 과연 그럴까?
 

항우는 유방에 비하여 처음부터 참모, 군사, 군비, 명분 등 거의 모든 면에서 앞섰다.  항우는 궐기 초기에 전략가 범증(范增)의 조언을 따르면서 급격하게 세를 키웠다.  일대영웅 항우의 몰락을 부른 것은 연전연승에서 비롯된 교만이었다.  교만은 항우를 어리석게 만들었다.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처리했다.  분별력과 결단력이 무뎌진 항우는 유방을 제거할 기회를 계속 놓쳤다.  충언과 간언을 구분하지 못했다.  자기를 그 자리에 올려준 범증을 비롯한 사람들의 충언을 멀리했고, 독단적이고 포악한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결국 동지들과 천하의 인심을 잃게 됐으니 그가 어찌 오래 갈 수 있겠는가? 
 

진평과 한신 같은 뛰어난 인재들이 유방에게 투항했고, 한신은 유명한 배수진을 치고 해하 전투에서 항우를 격파하는 선봉이 됐다.  진나라 수도 함양에 진격한 후  천하경영의 책략을 간언하였지만 항우에게 죽임을 당한 한생으로부터 목후이관(沐후而冠, 원숭이를 목욕시켜서 관을 씌워 놓았다)이라는 말까지 듣게 됐다.  급기야 진평의 간계에 빠져서 범증까지 내쫓았으니 항우의 몰락은 예정된 것이었다.
 

항우는 하루에 천리를 달리는 오추마에 올라 방천화극을 옆에 끼고 역발산기개세의 용맹을 떨친 천하의 용장이었다.  하지만 사방에서 초나라 노래와 함께 압박하는 적의 대군을 필마단기로 감당할 수 없었다.  결국 그가 선택한 것은 자살이었다.  그를 죽음으로 내몬 것은 때와 운의 불리함이 아니었다.  천하제패를 눈앞에 두고 생긴 교만함이었다.  때와 운은 하늘의 뜻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자세에서 생기는 것이다.  결국 그것도 하늘의 뜻이라고 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이제 불통으로 결국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하게 된 항우의 라이벌 유방을 살펴보자.  사실 미천한 신분인 유방을 항우에 비할 때 유방의 개인적 비범함을 찾기가  쉽지 않다.  신분에서 비롯된 삶의 고단함에서 체득한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유방은  음흉하리만큼 유연하게 처세했고 포용력과 용인술을 보였다. 

 특히 유방의 강점은 목표지향적 소통능력이었다.  항우를 꺽고 한나라를 창업할 때까지 흉폭한 진나라를 멸망시키고자 하는 민심의 목표에 맞춰서 일관성 있게 행동한 것이다.  그런 면이 없었다면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그에게 범증과 쌍벽을 이루는 전략가 장량(張良)을 비롯해서 소하, 조참 등과 같은 인재들이 올 리 만무했다.  항우의 사람이었던 한신, 진평 등을 결코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항우가 무력으로 함양으로 진격할 때 외교적으로 협상하면서 한 달 먼저 함양으로 입성하지 못했을 것이다.

  유방은 함양 입성 후 진나라의 재물과 미색에 탐할 기세를 보였다.  이에 번쾌가 유방의 행동을 질책하자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이에 장량이 논어의 ‘좋은 약은 입에 쓰나 병에 이롭고, 옳은 말은 귀에 거슬리지만 행동에 이롭다’는 말로 번쾌의  뜻에 따르라고 조언했다.  그런 행동이 민심을 잃게 한다고 하자 유방은 이에 따랐다.  유방의 이런 행동은 한 달 후 함양에 입성해서 폭거를 저지른 항우와 극단적으로 비교됐으니, 천하의 민심은 유방에게로 갔고 그는 새로운 나라를 열었다.

  항우와 유방을 볼 때, 사람의 소통능력은 목표의 크기와 비례함을 알 수 있다.  원대한 목표가 있는 자는 목표를 이룰 때까지 소통할 수밖에 없다.  소통이 아니면 결코 큰 목표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에 목표가 없는 자는 소통하지 않는다.  더 이상 이룰 목표가 없거나, 시운이 자신을 도울 것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항우는 불통으로 패왕별희의 주인공이 됐지만, 유방은 소통으로 역사의 주인공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