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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녀

윤복순 윤약국약사

책상 서랍을 정리하다 비녀를 발견했다. 때가 끼고 얼룩이 져 세월이 많이 흘렀음이 한 눈에 보인다. 언제부터 가지고 있었을까 기억이 없다. 할머니의 몸만큼이나 작고 닳았다.

돌아가신 지 40년도 더 지났다. 할머니는 우리 마을에서 제일 장수하셨다. 구십을 바라보던 나이였다. 한 줌의 몸이었고 식사를 못하고 막걸리로 연명을 했다. 죽도 미음도 넘기지 못하였는데 막걸리는 수저로 떠 넣어드리면 입술을 움직였다.

할머니 덕분에 내가 살았다. 어머니는 나를 낳고 바로 아파서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그 당시는 분유가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핏덩이 갓난이를 어떻게 키웠을까. 낮에는 이집 저집 젖동냥을 하고 밤에는 당신의 빈 젖을 빨려 키웠단다. 할머니의 은공을 갚으려면 머리카락으로 신을 삼아 드려도 모자란다고 했다.

어머니는 요샛말로 장티푸스를 앓았고 그 후유증이 커서 오랫동안 요양을 했다. 나는 엄마젖을 못 먹고 자란 불쌍한 아이였기 때문에 좋은 것이 생기면 제일 먼저 나한테 주었다. 할머니의 예쁨과 식구들의 동정을 받았다.

벽장 속에는 간식거리가 늘 있었다. 동네에서 제일 어른이기 때문에 우리 집에서는 물론 동네 사람들도 좋은 것 귀한 것이 생기면 할머니한테 드셔 보시라고 가지고 왔다. 그런 것들을 아껴두었다 나에게 주었던 것이다.

할머니의 생신날에는 동네 어른들을 다 불러 우리 집에서 식사를 했다. 떡을 해서 집집마다 한 접시씩 돌렸다. 나는 떡 심부름을 할 때 행복했고 아주머니들도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던 것 같다.

할머니를 따라 고모네 집에 다녔다. 여러 번 간 기억이 있다.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내려서도 한 시간 이상 걸어갔다. 고모 네는 한 여름에도 나락 통가리가 있는 부자였다. 먹을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예쁜 원피스도 사줬다. 모시나 삼베 등거리를 입고 다니던 때다. 아마도 할머니가 사주라고 했을 것이다. 갈 때마다 새 옷을 사주었고 동네 친구들의 부러움을 샀다.

초등학교 육학년 때 고등학교에 다니던 언니가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갔다 오면서 뚜껑이 있는 컵을 사왔다. 그것은 할머니의 타구가 되었다. 할머니는 기침 천식이 있었다. 그 당시 어른들은 기침을 많이 했던 것 같다.

할머니는 딸 둘을 낳고 청상과부가 되었고 아버지가 열 살 때 양자로 들어왔다. 그 때문인지 할머니는 담배를 피우셨다. 긴 담뱃대에 담배를 꾹꾹 눌러 넣어서 피웠다. 기침 천식이 쉬 나을 리 없었다. 밤이면 심해 타구엔 가래침이 많았다.

아침마다 타구를 깨끗하게 씻어 놓는 것은 나의 몫이었다. 그것이 내가 효도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때는 병원도 없고 노환이고, 이런저런 단방약이야 썼겠지만 별 신통력이 없었는지 할머니의 기침은 좋아지지 않았다.

우리 집이 농사를 많이 지었고 소가 재산목록 1호였던 시절이었다. 어느 날 소가 일어나지도 못해 아래뜸에서 의원이 와서 사관침을 놓았다. 그때 할머니가 하신 말씀이 지금도 생생하다. “소는 아프니까 의원을 불러오는데 나는 날마다 아프다고 해도 들은 척도 않는구나. 나는 소만도 못하다.” 아버지 어머니께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어찌 할머니가 소만도 못할까.

중학생 때였을 것이다. 어머니가 아침밥을 준비할 때 늘 깨워주었다. 동네 샘에 가서 첫물을 떠 왔다. 동네에 우물이 두 개 있었는데 하나는 개인 집에 있고 가까웠다. 다른 하나는 동네 끝에 있어서 한참을 걸어가야 했다. 새벽이라서 동네 샘으로 가서 물을 떠 왔다.

할머니가 항아리 속에 있는 물이 아닌 샘에서 바로 떠 온 새 물을 마시면 건강에 좋을 것 같았다. 그리고 내 정성이 더해져 더 효과가 있기를 빌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물을 떠 왔다. “아이구 내 새끼 내 새끼” 하면서 좋아하셨다.

어머니는 백일기도를 하듯 백일을 채우라고 했다. 그런데 못 채웠다. 동네 시암 품는 날 다음날은 샘을 덮어놓고 아무도 못 가게 했다. 석 달 가까이했었는데 아쉽고 못마땅하고 부아도 났다.

돌아가시기 몇 년 동안은 대소변을 받아냈다. 어머니가 하루에도 몇 번씩 빨래를 했지만 이부자리에서는 냄새가 났다. 돈을 벌어서 좋은 이불과 요를 사 드리고 싶었다. 대학 2학년 겨울방학 때 돌아가셨다. 아무것도 해 드린 게 없다.

할머니가 자리보존하고 누워 계실 때 비녀를 빼 놓았다. 몸이 사그라진 만큼 비녀도 닳아 몽당연필 같았다. 내가 챙겨 귀하게 잘 간수했다. 결혼하면서 까맣게 잊어버렸는데 언제 어떻게 내게로 다시 돌아왔을까.

때 끼고 얼룩진 닳을 대로 닳아 가늘고 작아진 은비녀, 돌아가시기 전의 당신 모습 같아 한참을 손에 들고 있었다. 고모네 집에 따라 다닐 때만해도 할머니만 은비녀를 했고 동네 아줌마들은 목비녀나 놋쇠비녀를 했다. 그래서 할머니의 비녀가 동네의 위 어른임을 표상하는 것처럼 멋져 보였었는데......

기침 천식으로 고생하실 때 아무것도 못 해드렸던 것처럼 또 유품을 아무렇게나 지니고 있었다. 죄책감에 바로 반들반들하게 닦아 한지를 깔고 그 위에 올려놓았다. 할머니를 새 이브자리에 뉘여 드린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