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 사람들 > 마이너의 행복

마이너의 행복

윤복순 윤약국약사

베란다에 올망졸망한 화분이 너 댓개 있다. 이것들은 모두 덤으로 얻은 것들이다. 덤으로 얻은 것들인데 뭐 대단하겠는가. 포트에서 이식을 기다리고 있는 것들로 1회용에 불과했다.

지난 3월 내 생일 때 장미 예순한 송이를 사니 알고 지내는 꽃집 주인이 소품으로 준 것이다. 생일 이틀 전에 후레지아를 몇 단 사다 양주병에 나누어 방마다 거실 부엌 욕실 베란다 등에 꽂아 두었다. 생일에 맞춰 활짝 피라고. 당일엔 장미를 질항아리에 듬뿍 꽂고 화려한 서양란도 하나 들여 놓았더니 소품들은 눈에 띄지도 않았다.

화무십일홍이라고 꽃들은 며칠 못가 다 시들고 못난 우수리들만 남았다. 혹시나 하여 때맞추어 물을 주었더니 이것들이 주인의 은혜에 보답이라도 하듯 죽지 않고 자랐다.

아침운동을 갔다 오다 아파트 화단에서 흙도 버리지 않은 플라스틱 화분이 나뒹굴고 있어 주워왔다. 못난이들 중 가장 옹색한 것부터 분갈이를 해 주었다. 분갈이는 분에 비해 포기가 너무 자랐거나 흙이 오래되어 거름이 없을 때 해주며, 기존 화분보다 직경이 3~5Cm 정도 큰 걸로 하면 된다고 알고 있다.

새 화분을 산다면 그렇게 하겠지만 이것들이 잘 자랄지 어쩔지도 모르고, 화분이 고급스러우면 우수리들의 삶과는 언발란스일 것 같아 이렇게 화분을 하나씩 주워다 네 개를 다 갈아주었다.

재활용을 하다 보니 남의 옷을 얻어 입은 것처럼 구럭 같기도 하고, 전 것 보다는 낙낙하지만 곧 갈아줘야 할 것도 있고 그렇다. 저희들이 귀하지 않다 는 걸 알았는지 무탈하게 열성을 다해 크는 것 같았다.

서양란은 이미 꽃이 다 지고 잎마저 시들시들해 미련 없이 뽑아 버렸다. 장식으로 심어졌던 천양금만 너풀너풀 잘 자라고 있다. 며칠 전에는 조그만 꽃까지 피웠다. 그 꽃에서 빨간 열매가 맺을지 지켜보고 있는 중이다. 못난이들이 새로운 화분에 자리를 잡으면서 이제는 죽지 않을 거란 확신이 생겼다. 이름을 불러줘야겠다.

하나는 홍콩야자다. 잎이 풍성하고 생명력이 강해 그들 중 키가 제일 크다. 네가 일등이라고 칭찬을 해주니 더 잘 자란다. 하루하루 녹색이 진해지고 청년티가 난다.

다음은 철쭉이다. 우리집에 올 때는 아주 작은 꽃망울이 맺혀 있었다. 꽃을 피워 연분홍으로 봄을 선물해 줬다. 봄이 가니 꽃은 다 떨어지고 분갈이를 해주니 몸살을 하는지 영 더디게 잎을 불린다. 분이 철쭉에 비해 너무 커서인지 더 왜소해 보인다.

하나는, 어느 날 넝쿨손이 나기 시작했다. 바느질실을 세 겹으로 해서 줄을 달아주었더니 그걸 타고 올라 창끝에 닿았다. 이제는 천정으로 뻗는다. 꽃도 피었다. 꽃 색깔이 참 곱다. 여느 나팔꽃보다는 작고 유홍초보다 크다. 새벽에 일어나서 보면 작은 미풍에도 실에 매달린 줄기가 낭창거린다. 그 리듬이 여간 아니다. 그냥 나팔꽃이라고 하기엔 매우 고혹적이어서 애칭을 붙여주고 싶다. 고유의 영혼을 담아 “바람을 쫓아 웃는 여자” 라고 할까, 꽃말을 따라 “기쁨을 주는 여자” 라고 할까 고민 중이다.

마지막 하나는 꽃기린이다. 작아서 아름다운 꽃이다. 이 여리여리하고 귀여운 것에 가시가 있어서인지 꽃말이 ‘고난의 깊이를 간직하다’란다.

이렇듯 나의 베란다에는 규모가 작은, 사소한, 그리 중요하지 않은, 이류의 집단, 즉 덤으로 받은 마이너들이 있다. 이 마이너들로 인해 나는 넘치게 계절을 느낄 수 있고 행복한 아침을 맞을 수 있다.

아무리 예쁜 꽃도 그걸 담는 그릇이 모자라면 그 꽃에 대한 도리가 아니고, 쓸데없이 넘치는 그릇이면 꽃들이 옹색하고 초라해져 그 또한 예의가 아니라고 한다. 사람도 삶도 그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나에겐 이들이 딱 맞는 옷인 것 같다.

나의 화분은 그럴듯한 화려함도 없고 품위도 없다. 아무런 특색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못난이 삼형제같이 정이 가고 애착이 간다. 비싼 화분이나 좋은 흙에 담기지 못했건만 한 마디 불평도 없이 행복하게 자유롭게 천연스럽게 그 개성을 발휘한다. 이런 꽃나무들을 나는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장미, 후레지아, 서양란, 이 메이저들은 며칠 가지 못했다. 나 같은 보통 사람을 위로해 줄 수 있는 것은 같은 처지의 마이너들뿐이다. 이것들의 몸짓에 행복할 수 있는 만큼이 내 행복의 그릇이다. 이만한 용량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오늘 새벽에도 베란다의 나팔꽃이 나를 보고 웃었다. 그래서 오늘도 나의 날이 될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멀리서 행복을 찾지만 현명한 사람은 발밑에 행복을 키운다고 하지 않던가.

나의 베란다에는 올망졸망한 행복이 이렇게 자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