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한국예총 익산시회장
김 영 규

포근해 보였던 푸른 하늘을 멀리하니, 스치는 바람이 차갑고 날카롭다. 그야말로 자연스럽게 채색된 아름답고 화려한 그리고 다양한 색깔의 낙엽들은 어느새 바닥에 쌓여 환경미화원 아저씨 어깨를 무겁게 한다. 벌써 12월! 올해도 저물어 가고 있으며 눈 깜짝할 사이에 매일 매일이 지나가고 있다.

한 해 동안 가까이에서 자주 들여다보던 달력이 달랑 한 장뿐이다. 마음 아프고, 슬픈 사연들이 유난히도 많았던 갑오년(甲午年)도 이제 얼마 후면 역사의 수레바퀴 속으로 사라질 것이니 참으로 세월같이 무심하게 빠른 것이 없나보다.

지난 연말에 어렵게 구한 달력은 약속장소, 시간과 만나야 할 사람이름, 가족과 친척의 대소사 등, 잊혀져 가는 기억력을 일깨워 주던 깨알 같은 내용과 함께 누렇게 변하여 달랑 매달려 있다.

해마다 겪는 일이지만 머지않아 또다시 결별과 마주하고 또 한 살의 나이와 구질구질한 경력들을 서둘러 선을 긋고 마감을 하고 마는 것이다. 어린 날의 한해는 무척이나 길고도 멀었다. 그러나 해를 거듭하면서 적당히 짧아지더니 이제는 너무나도 빠르게 한해가 가버려 현기증이 날 정도다. 크고 작은 헤어짐에 상당히 익숙해져 있는 우리지만 떠나고 떠나보내는 이별이란 분명 마음 아픈 일이다.

태양은 공평하게 빛을 보내고 있지만, 세상 모두에게 공평하게 빛이 닿지는 못하는 모양이다. 장애물이 있어서, 스스로 편협하게 덧문을 내려 햇살의 혜택을 거부하는 경우도 없지 않을 것이다. 인간 생활에는 순조로운 흐름과 마음의 진행을 가로막는 크고 작은 방해자가 있게 마련이다. 그 마음의 방해자를 제어하면서 열심히 최선을 다 할 때 결과가 어느 정도이든, 그 노력의 기쁨은 내 것일 수 있으리라 믿는다. 해가 바뀌면 나이가 한 살 더 많아지는 것은 당연하며, 거부할 수 없는 일이기에 그때마다 일어나는 심리적 변화나 수용태세는 인생화를 채색하는 희·비·애·락의 온갖 색채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다만 모든 일이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고 하듯이 아쉬움에 연연해하기 보다는 당연한 생을 진지하게 응시하는 시간이 필요한 연말인 것이다.
지난 1년간 도대체 무엇을 했나하는 자문 앞에 그 대답은 반성의 두께만 더해갈 뿐이다. 흘러간 생활의 반성은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며 자기 자신을 응시하는 힘이고 자아에 눈뜨는 힘이다. 자아에 눈 뜸으로서 자신을 아끼고, 이웃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게 되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광복 70여년이 지나고 경제대국이니, 민주화니, 세계적 신화를 이루었다고 자랑한 우리의 눈앞에서 꽃다운 청춘, 내 자식보다도 더 예쁘고 나이 어린 300여명의 아까운 생명을 바다 속으로 사라져 버리게 했다. 세월 속에 파묻힌 산천초목은 옛 그대로 보일지 모르나 사람은 옛사람이 아닐 만큼 늙어간다. 흐르는 강물처럼 세월은 언제나 끊임없이 흐르게 마련이다. 한스럽고 안타까웠던 일들도 어쩔 수 없이 누그러진다. 불안과 초조, 피로 얼룩진 시련이 너무나 엄청나서 말문이 막힐 뿐 세월은 무정한 것이다.

지난세월 탓해서 무엇하리! 세월은 듣지도 보이지도 않은 채 그냥 그대로 흘러갈 뿐. 매정하다. 세월은 가고 인정만 남는다고 했던가. 세월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리라 기대하지만 세월같이 냉엄한 시간의 흐름을 고찰할 뿐이다.

한해가 거의 가버린 지금, 이 겨울에 우리는 서로 부르고 찾으며 도움을 주면서 얼어붙은 이 땅의 이웃들의 추위를 잠시 잊고 지낸다. 가는 것과 남아 있는 것과의 구분을 위해 높고 낮은 곳에서 종이 울릴 것이다.

다시 새로운 한 해를 맞이 한다 해도 결국은 올해와 비슷하게 걸어갈 수밖에 없겠지만 어처구니없게도 어린 날의 종소리는 무척이나 청아하고 희망적이였다.

기다리며 살아간다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운명이겠으나 그래도 한번 살아볼 가치가 충분한 것이 우리 인생이 아니겠는가. 이제 갑오년의 묵은 마음과 먼지를 걷어내고 미움을 사랑으로 불행을 행복으로 바꿔보자.

경제적으로 불황이라 그런지 신년도 달력이 귀할 거라고 한다. 메모할 여백도 충분하며 보기도 좋은 달력을 여러 개 얻어야 할 터인데 그 일이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