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복순 윤약국약사

약국 문을 닫고 대형마트로 샛거리를 사러 간다. 매일 같은 것을 줄 수도 없고 날마다 새로운 먹을거리가 나오는 것도 아니니 고민은 고민이다. 일하는 사람들에게 새참을 안 줄 수도 없으니 아이디어 공모라도 해야 할까보다.

우리 포도밭에 일하러 오는 사람들 중에는 칠십을 넘긴 분들이 있다. 모두 한 동네 사람들로 제일 나이가 많은 분은 78세시다. 허리가 곧고 어깨도 굽지 않아 뒤태는 아가씨 같다. 얼굴도 편안해 보인다.

포도밭에 오시기 전에는 고구마를 심으러 다녔단다. 고구마 밭 보다는 포도밭일이 수월하다고 한다. 일할 수 있다는 게 즐거운지 도란도란 이야기가 끝이 없고 가끔은 웃음도 터진다.
아침 7시부터 일을 시작하는데 그 분들은 더 일찍 데리러 오라고 한단다. 해가 동동하니 어서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밭에 도착해서도 커피라도 한 잔 마시고 시작하자고 하면 집에서 마시고 왔다며 자기 일처럼 바로 시작한다고 한다.

모두 교인들이라 일요일은 쉬었는데 일이 급박하다고 하니 지난 일요일은  나오셨다. 나는 그날 처음 뵈었다. 남편이 일손 때문에 걱정을 하니 교회 가는 일도 마다하고 이처럼 나온 것이다. 농사라는 게 때 놓치면 안 된다면서.

새참은 오전 오후로 먹는다. 샛거리는 빵, 우유, 떠먹는 요구르트, 생수, 오이, 수박, 떡 등을 산다. 빵집 아주머니는 우리 부부를 알아보고 새로운 빵을 만든 날이면 우리 것을 남겨놓고 기다리고 있다. 

점심은 식당에서 사 먹었다. 식당 밥이라는 게 하루 이틀은 몰라도 매일 먹는 것은 집밥만 못한가 보다. 아주머니들이 남편에게 밥을 해 먹으면 좋겠다고 했고  제일 나이 많은 그 할머니가 당신이 하겠다고 나섰단다.

찌개거리만 사다주면 반찬은 당신네들 집에서 조금씩 가져오면 된다며 상치 같은 푸성귀는 시골이라서 매일 가져 올 수 있다고 하더란다. 흰 떡에는 고명 안 들어 가냐는 말처럼 샛거리에 반찬 걱정까지 생겼다. 

아주머니들은 소탈하고 그 할머니는 요리솜씨가 좋아 당신들 입맛에 맞게 만들어 잘 드신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일의 진도가 나가지 못한 날은 오늘은 통 일을 못해서 어떻게 하냐며 그 할머니가 남편을 위로해 준단다. 마치 큰 누나가 막내 동생을 걱정해 주듯이.

우리 아파트의 할머니 한 분은 토요일과 일요일이 없었으면 좋겠단다. 평일엔 아들 며느리가 출근을 하고 나면 당신 세상이고, 동사무소로 이런저런 것들을 배우러 다닌다고 한다. 주말에는 기숙사에 있는 손자까지 식구들이 다 있어 자리를 비워 주고 싶단다.

혼자서 여행을 할 수도 없고 공원에 나가 하루 종일 앉아 있기도 그렇고, 주말에는 노래교실이나 요가교실이 문을 여는 곳도 없어 곤욕스럽단다. 나보고 일요일 포도밭에 데리고 가라고 한다. 그러나 바쁜 농사일 때문에 내가 당신과 놀아줄 수 없고 당신은 밭일을 할 줄 모르니 딱할 뿐이다.

칠십을 넘긴 할머니들은 대부분 노후대책을 세우지 못한 것 같다. 오직 아들 딸 잘 키우고 가르쳐, 살림 내어 주는 것이 전부인 줄 알고 살지 않았던가. 언제부턴가 백세시대라며 노년의 기간이 길어졌으니 편안하기만 한 노후는 아닌 것 같다.

여유가 된다면 아들네 아파트 같은 통로에 마주보게 당신 집을 장만해 놓고, 출근하는 며느리를 도와주고 쉬고 싶을 때는 당신 집에서 쉬면 좋을 텐데 말이다. 그러면 아들 며느리랑 같이 식사도 할 수 있고 틈틈이 들여다보기도 쉽고 그들도 편히 쉴 수 있을 테니 여러모로 괜찮을 것 같은데.

지난 일요일 그 할머니가 참외와 오렌지를 가지고 오셨다. 딸 사위가 왔단다. 오늘 같이 보내야 할 텐데 이렇게 일 나오셔서 어떻게 하냐고 하니 어제 저녁 오늘 아침밥 같이 먹었으니 됐단다. 딸이 사가지고 온 과일을 이렇게 들고 나오신 것이다.

아들딸들을 잘 키워 잘 살고 있단다. 아들이 혼자서 고생하지 말고 같이 살자고 하는데 당신이 고집을 부리고 있다고 한다. 내 솥단지 걸고 내 살림 살 때가 내 인생이지, 아들네 집에 가서 살면 아들 살림이지 내 살림이겠냐고 한다.

평생을 살아온 동네라 한 식구 같고, 아직은 건강해 일할 만 하고, 내가 벌어서 쓰고 싶은데 쓸 수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며 웃는다. 그 모습이 당당해 보였다. 

  스스로 선택한 맑은 가난 즉 청빈함을 할머니한테서 본다. 내려놓을 것 내려놓고 비울 것 비우고 만족할 줄 알기에 편안한 마음의 삶을 살고 있는 것 같다. 

  일요일 받은 품삯은 감사헌금을 내야겠단다. 할머니가 행복해 보였다. 내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을 내가 직접 할 때 행복하다. 조촐하게 살면서 감사한 마음이 들 때 행복하다. 

  나도 포도 밭일을 통해 마음의 평화와 안정을 듬뿍 얻었다. 포도 넝쿨손을 자르고 가지를 반듯하게 세워줬더니 포도나무들이 사열하는 장병들만큼이나 늠름하고 질서정연해 보기 좋다. 뿌듯하고 행복했다. 

  이웃을 기쁘게 해 주면 내 자신이 기쁘고 이웃을 괴롭히면 내 자신도 괴롭다. 이것이 마음의 메아리다. 나이 많은 할머니가 이토록 솔선수범을 보이니 포도밭에서 일하는 다른 아주머니들도 모두 좋은 분위기에서 일을 한다고 한다. 덕분에 남편도 요즘 같은 더위에 지치지 않는 것 같다.

오늘은 무엇을 살까. 샛거리에 점심 반찬까지 머릿속은 복잡하지만 그 할머니를 생각하면 늦은 저녁이라도 발걸음이 가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