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복순 윤약국약사

여느 날과 다름없이 공원으로 새벽운동을 나갔다. 지금 내 나이에는 건강이 최고의 행복이고 최고의 자산이라고 생각해 비오는 날에도 나간다. 크게 공원을 한 바퀴 돌고 나의 자리로 간다.
그곳은 소나무동산으로 흙길인데다 둘레 길이 아니고 가운데 길이라서 좋다. 작아서 한 바퀴 도는데 채 2분도 걸리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쉬 실증을 느껴 두어 바퀴 돌고는 다른 곳으로 가 버린다. 나이 드신 분들은 이곳이 평평하지 않고 나무뿌리들이 튀어나와 넘어질까 봐 접근하지 않는다. 이래저래 나의 공간이 되었다.

이곳은 완만하지만 경사가 있고 이런저런 큰 나무가 있어 햇빛이 강렬하지 않고 얼룩덜룩 그늘을 만들어 준다. 나무 밑으론 구절초가 자라고 있다. 

오늘도 그 길에 비질이 되어 있다. 벌써 며칠째 이렇다. 누군가가 맘먹고 비를 가지고 와 동네 고삿길 청소를 하듯 깨끗하게 해 놓았다. 이럴 필요가 없는데 무슨 연유일까, 또 누구일까.

10여 년 전 그녀는 비쩍 말라 흡사 어린아이 같은 모습으로 우리 약국에 왔다. 밥을 먹지 못해 40Kg도 못나간다고 했다.

어느 개인병원에서 이런저런 검사를 했는데, 의사가 위(胃)가 축 늘어져 쌀자루같이 생겼다며 의사생활 몇 십 년 했지만 이런 위는 처음 본다며 겁을 주더란다.

나이가 오십이 넘었으니 위하수가 있는 것은 당연하다. 얼굴만 처지겠냐. 속도 처지지. 처진 위를 올라붙게 하는 약은 양방으론 없고 한방으론 승마 지실 등이 있지만 걷기운동만은 못하니 많이 걸으라고 했다.

위하수증은 위의 무력으로 소화불량 복부팽만 등 위장장애는 물론 우울증과 불면증이 오기도 하는데 그녀는 갱년기까지 겹쳐 많이 힘들어 했다.

보다 못한 그녀의 남편이 서울의 큰 병원으로 데리고 갔고, 그 병원의 유명한 의사가 “아주머니, 이것은 병도 아닙니다. 위암으로 위를 절반이나 잘라 낸 사람도 살려고 치료 받는데 위 조금 내려앉은 것이 뭐 대수겠습니까.” 하며 아무 걱정 말고 약 먹으면서 운동 열심히 하라고 하더란다.

그녀는 그 유능한 의사 덕분에 반절은 나아서 내려왔고 가끔씩 우리 약국에 들러 놀다갔다. 그 사이 그녀가 고등학교 선배임도 알았다.

위하수에는 물구나무서기, 자전거타기, 철봉매달리기 등이 좋지만 우선은 걷기부터 시작하라며 나만의 공간을 소개했고 특별히 그곳에서 걸을 수 있는 자격도 준다고 했다. 그러나 그녀가 언제 걷는지 내 운동시간에는 한 번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나의 공간에서 한 시간정도 걷고 맨손체조를 한다. 나무 밑을 걷는 동안 나는 선해지고 편안해지고 샘물처럼 맑아진다. 나무들이 세파에 찌든 나의 몸과 마음을 이렇게 정화시켜 준다. 그 덕분으로 아직까지 건강하다.

그 곳엔 소나무, 벚나무, 아카시, 개복숭아나무, 때죽나무 등등이 있다. 이들이 때를 맞춰 꽃을 피우고 때를 알아 지더니 열매를 맺었다. 때죽나무가 이상하다. 흰 꽃을 피웠다가 열매를 죽 달고 있는데 아랫부분의 다른 가지에 때늦은 꽃이 피었다. 색깔이 흰색이 아니고 연두색이고 꽃의 크기도 크다. 왜 이런 변종이 나왔을까?

나는 때죽나무에 관심이 갔다. 나무에 때가 낀 것 같다 해서, 열매가 사람 얼굴처럼 생긴데다 회색빛이 도는데 죽 매달린 모습이 스님이 떼로 있는 것 같다 해서 떼중나무였다가 때죽나무가 되었다는 설이 있다.

어릴 때 우리 동네에서는 이 나무의 잎과 열매를 찧어서 냇가에 풀면 물고기들이 둥둥 떠올랐다. 그러면 물고기를 주워 담았다. 에고사포닌이란 천연마취제 성분 때문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때죽나무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꽃이 참 예쁘고 향도 좋다.

나중에 핀 것은 꽃이 아니라 벌레들의 집이란다. 어쩐지 꽃잎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과육처럼 두툼했다. 그 벌레들이 나무와 공생을 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그 나무를 병들게 한단다. 나무도 나이를 먹으니 저항력이 떨어져 벌레들의 침범을 이겨내지 못하는 모양이다. 벌레집이 처음엔 서너 개였는데 무엇인지 몰라 방치한 사이에 열 개가 넘는다. 올해 처음 있는 일이다.

올 봄 선배가 한 쪽 귀가 들리지 않아 병원에 입원을 했고, 서울 전문병원까지 다녀왔단다. 그 뒤로 시름시름 앓더니 또 하루가 다르게 말라간다.

한 달 전쯤 선배가 나의 공간에서 걷고 있었다. 반갑게 눈을 맞췄는데 한 이틀 후부터 또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며칠 전부터 나의 공간에 비질이 되어 있는 것이다.

아파트 할머니가 운동 갔다 오는 길이라며 약국에 들렀다. “약사 운동하는데 누가 쓸어 놓는지 알아?” 선배 내외가 나와 남편이 깨끗하게 쓸면 아내는 맨발로 걷고,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남편이 쪼그리고 앉아 아내 발을 닦아주고 신발을 신겨줘 가며 운동을 시키더란다. 남편 사랑 많이 받으니 어서 털고 일어나 오래오래 재미있게 잘 살라고 말해주고 왔단다.

때죽나무의 벌레집을 다 따서 햇빛이 잘 드는 공원 운동장의 한쪽에 널어  놓았다. 벌레들은 죽어갈 것이고 나무는 잘 자랄 것이다. 선배가 나의 공간에서 열심히 걷고 나무들의 기운을 받아 입맛을 찾고 안정을 찾아 건강해졌으면 좋겠다.

나는 오늘도 선배 남편이 쓸어놓은 그 길을 걷는다. 벌레에서 해방된 때죽나무가 싱글벙글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