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중이라서 한낮 뿐만 아니라 저녁에도 더위 때문에 고생을 한다. 습도까지 한 몫을 해 쉬 지치고 맥이 없다. 틈만 나면 잠이 쏟아지고 병 걸린 닭 마냥 약국에서 시들시들 졸고 있을 때도 있다.
일요일 만사 제쳐두고 운일암반일암 쪽으로 약초채집을 나갔다. 에어컨을 끄고 창문을 활짝 열었다. 속도를 최대한 낮췄다. 콧구멍을 크게 벌리고 심호흡을 하니 녹음이 온몸에 생기를 불어넣어준다.
마음이 꼬치는 곳에 차를 세우고 산에 들어가 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도라지도, 영지도, 잔대도, 더덕도. 모기한테 보시만 했다. 산신령이 “이 아름다운 곳에서 구경이나 실컷 하지 무슨 약초까지 캔다고 그러냐.”하는 것 같아 마음을 내려놓았다.
산바람이 상쾌하다. ‘이런 것이 풍욕인가.’ 눈을 살짝 감고 콧소리를 내며 얼굴을 흔들었다. 바람 맛이 손녀의 볼을 비벼대는 것만큼이나 행복하다.
운일암반일암에는 물놀이를 나온 사람들이 많다. 내가 처음 이곳에 온 것은 대학 2학년 여름방학 때이다. 진안군 부귀면으로 봉사활동을 갔다. 무슨 활동을 했는지는 기억이 없다. 약대생들만의 동아리였고 우리반에서 대 여섯 명이 갔을 것이다. 출발하기 전부터 봉사활동은 뒷전이었고 끝나면 운일암반일암 구경을 가자고 의견을 모았다.
70년대 초 교통사정이 형편없던 때 그것도 무진장지구(무주 진안 장수) 그러니까 오지중의 오지인 곳이다. 봉사활동 해산식을 하고 서둘렀지만 진안군 소재지에 도착하니 벌써 늦은 오후였고 그곳에 가는 버스는 이미 끊겼다. 진안에서 1박을 했다.
밤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가 다음날도 내렸다. 마치 버스가 배가 된 듯 했다. 비포장도로에 넘치는 빗물이 버스가 지나가면 양 옆으로 짝 갈라졌다. 냇가인지 도로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필경 도로가 유실되어 버스가 더 이상 갈 수 없다고 해서 운일암반일암을 그야말로 몇 미터 앞에다 두고 그냥 집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운일암반일암은 운장산(雲長山)의 계곡이다. 운장산은 구름에 가려진 시간이 길다하여 부쳐진 이름이다. 해발 천고지가 넘는 산으로 길은 없고 하늘과 돌과 오고가는 구름만 있는 곳이라 하여 운일암(雲日岩), 하루 중 햇빛을 반나절 밖에 볼 수 없다고 하여 반일암(半日岩)이라 불려진다.
그때의 아쉬움에 여름이면 운일암반일암에 가게 되었다. 이십여 년 전부터 동상에서 주천으로 그러니까 운장산 이쪽에서 저쪽으로 넘어가는 길이 뚤렸다. 대아리저수지에서 운일암반일암까지 가는 길, 내 멋대로 우리나라에서 제일 멋진 길이라고 정해 놓았다. 경치가 아름다운 건 말할 것도 없고, 저수지에 거꾸로 잠긴 산의 그림자를 보며 역지사지의 마음을 가져 보기도 하고, 훠이훠이 운장산을 감고 오르는 길이 느린 듯 여유로워 조급증이 많이 순화된다.
내친 김에 용담댐까지 가기로 했다. 금산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여전히 창문은 열려있고 서행중이다. 갑자기 더덕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적당한 곳에 주차를 하고 그쪽 산으로 올라갔다.
사막에서 바늘 찾기다. 길도 없는 곳으로 오르려니 등산보다 몇 배 힘이 든다. 그리고 무섭다. 뱀도, 벌도. 지팡이로 나무를 툭툭 치기도 하고 쿵쿵 땅을 때리기도 한다. 이미 풀들도 억세져서 속도를 내지 못하니 약초들이 보이는 것이다.
영지 두 개와 새끼손가락 같은 도라지와 더덕을 이십여 개씩 캤다. 잎에도 꽃에도 영양분이 있어 전체를 캤다. 발견은 남편이 해도 캐는 것은 거의 내 몫이다. 손맛을 보라는 남편의 배려다. 내가 캐고 있는 동안 남편은 또 사냥감을 찾아 주변을 헤맨다.
남편이 갑자기 내 손을 잡더니 빨리 내려가자고 한다. 새끼들은 아직도 많다. 더덕은 어미가 있으면 그 주변에 씨앗이 떨어져서 무더기무더기 난다. 나는 그것들을 캐다 포도밭 한 쪽에 심을 생각이었다. 아쉬워하는데 무엇 때문인지 말도 해주지 않고 잡아끄는 것이다. 허겁지겁 내려왔다.
멧돼지가 진흙맛사지를 하고 간 곳을 보았단다. 얼마 되지 않았는지 흙탕물이 그대로 있고 발자국도 선명했단다. 아마 우리들 발소리에 도망간 것 같다고 했다. 그 말을 해주면 내가 놀라 헛발을 디딜지 몰라 말없이 끌고 내려 온 것이다.
도라지 더덕을 씻어 댕댕이덩쿨로 만든 채반에 널어놓고 바라보는데 꽤 부자가 된 기분이다. 참으로 귀물스럽고 오지다. 애들을 내려오라고 할까, 부쳐줄까 마음이 바빴다.
동네 성(兄)이 어찔어찔하다며 맛있는 것이나 먹으러 가자고 한다. 며칠 만에 나오셨는데 정말 체중이 좀 줄어 보였다. 걱정이 되어 물으니 젊은 애들이랑 여행을 다녔더니 무리가 되었는가 보단다. 지금도 청춘인줄 아시냐며 내가 사드리겠다고 하니 당신이 사겠단다.
성이 정말 식사를 통 못하신다. 내가 원체 맛있게 잘 먹으니까 어지간하면 덩달아 잘 드실 텐데 더위에 지치신 것 같다. 약초채집 갔다 온 이야기를 하며 성에게 드리겠다고 했다. 감동 먹은 얼굴로 산도라지고 산더덕이니 인삼보다 좋을 거라며 기운도 잡고 밥맛도 잡을 것 같다며 좋아하신다.
성한테 적시에 좋은 선물을 한 것 같아 기분이 좋다. 나는 운일암반일암을 여행한 것으로, 더덕이며 도라지를 캔 것으로 이미 보약을 먹은 거나 진배없다. 우유를 먹는 사람보다 배달하는 사람이 더 건강하다고 하지 않던가.
운장산의 정기를 받아서 기운이 난다. 더덕 도라지도 캐고 영지도 따면서 힐링도 되었다. 성이 정말로 고맙게 선물로 받아주어서 보람도 있다. 성이 복달임으로 맛있는 밥도 사주었으니 이만하면 삼복더위쯤이야 가볍게 버텨내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