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복순 윤약국약사

일요일 포도밭에서 일찍 돌아와 시어머니가 계시는 요양병원에 갔다. 집에서 가까운 곳이라서 그나마 다행이다. 처음에는 면회를 가면 자꾸 집에 따라오시고 싶어 했는데 지금은 헤어질 때 손을 흔들 만큼 익숙해졌다. 안 가면 숙제를 안 한 것 같이 부담이 되고 가서 보면 변해가는 당신의 모습에 마음이 아프다.

병실에 들어가니 작아질 대로 작아진, 마치 하얀 모자를 쓴 듯 검은 머리칼 하나 없으니 더욱 초라해 보이는 모습으로 TV를 보고 계셨다. 어느 여학교의 도전 골든벨 프로다. 시모는 나를 보더니 “우리 소영이가 공부를 잘 해서 텔레비전에 나올 텐데 여적 안 나와 눈이 빠지게 보고 있는 중이다.” 하신다.

소영이는 나의 딸이다. 이미 결혼해서 애를 다섯이나 낳았다. 시어머니는 또 어느 과거의 시간을 헤매고 계신다. 치매는 현재 일은 까맣게 잊고 과거의 어느 시점은 깜짝 놀랄 정도로 정확하게 기억한다. 딸이 여고생일 때는 20여 년 전이다.

그 때쯤 어느 해 가을 시어머니는 통 말씀이 없으셨다. 분위기 전환을 위해 시누이가 며칠 동안 모셨다. 시누이집에서도 염주만 돌리실 뿐 우두커니 앉아계셨단다. 잠도 주무시지 않고.

그래서 온 가족이 어른들을 모시고 아침식사를 하기로 했다. 당신이 제일 좋아하는 큰아들이 있으니 기분이 좋아 부엌에서 거실로 발걸음이 가벼우실 텐데 그날은 무반응 이었다. 큰아들이 좋아하는 도라지 무침을 큰아들 앞으로 놓으며 많이 먹으라는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시모는 진지도 뜨는 둥 마는 둥 하셨다. 몇 달 전부터 당신의 작은 아들이 밤늦게 들어오고 가끔씩 술까지 하니 걱정을 많이 하셨다. 거기다 큰 아들인 남편이 진급에서 누락되니 크게 낙담하신 것 같았다.

시어머니는 큰아들 마음걱정 헤아릴라 작은아들 건강 챙길라 얼마나 신경을 쓰셨는지 눈동자에 힘이 없었다. 매일 염불을 하고 불경을 읽으시기 때문인지 얼굴이 맑고 생기가 있었는데. “어머니, 사람이 살면서 어떻게 좋은 일만 있어요? 안 좋은 일도 있고 더 좋은 일도 있고 그러면서 사는 거지요.”

그때까지 우리집에 좋은 일도 많았지만 그렇지 않은 일도 있었다. 보통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어려운 일이 생기면 지혜를 모아 헤쳐 나가며 모두 열심히 살았다. 가난했기 때문에 더 애틋했을 것이다.

내가 시집왔을 때 시댁은 관사에서 살았다. 결혼하던 해 이리역 폭발사고가 났고, 그날이 시아버지의 근무 날이어서 모든 책임이 시아버지에게로 돌아왔다. 시아버지는 교도소에 계시고 식구들은 관사에서 나와 셋방살이를 했다. 시누이가 대학 1학년 시동생이 고등학교 1학년 이었다. 그 역경에도 시어머니의 눈은 빛이 났다.

남편과 내가 돈을 벌었다. 우리 부부는 마음을 합쳐 시댁에 집도 사드리고 시동생들은 학교를 졸업하고 취직도 하고 결혼도 했다. 나도 딸 아들 낳아 잘 기르고 애들은 공부를 잘 했으며 남편은 제때에 진급을 척척 했다. 시어머니는 모두가 부처님의 원력이라고 했다.

시모는 대단한 불자로 큰방 벽장에 부처님 사진을 모셔놓고 아침에 일어나면 부처님께 정화수부터 올렸다. 밥을 해도 과일을 사도 먹는 것이면 무엇이든, 내가 생활비를 드려도 먼저 부처님께 올렸다.

하루에 4000만 번씩 ‘나무아비타불 관세음보살’을 하셨다. 우리나라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한 번씩 해주고 싶다고 했다. 1000 알의 염주를 아침 점심 저녁 주무시기 전에 만 번씩 돌리셨다.

나는 시어머니의 이런 정성이 우리집을 복되게 한다고 믿었다. 아마 시모도 정성을 다하는 만큼 집안이 잘 되니 더 정성을 기울였을 것이다. 그런데 남편이 진급에서 떨어지니 쇼크를 받았다.

“그동안 집에 좋은 일 많았잖아요. 앞으로 더 좋은 일 있을 거예요.”

“너 그 말 진심이냐. 하기야 내가 이렇게 허전한데 너는 더 하겠지.”

당신의 불편한 심기에도 나를 위로해 주시니 어머니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오늘 단합대회 나가는 것 어때요?”

오봉산에 올랐다. 자식들 기분 맞추러 따라 나선 것도 안다. 정상에 올라 운암 저수지를 바라보았다. 가슴이 탁 트일 줄 알았는데 가뭄에 야윈 저수지가 더 답답하기만 했다. 멍들고 벌레구멍이 나고 말라비틀어진 단풍은 시어머니의 마음이었을까.

돌아오는 길에 시어머니는 고해성사를 하듯 말씀 하셨다. 친구 분들이 보살님 정성으로 자손들이 다 잘 되는 것 같다며 당신을 부러워했단다. 그런데 남편이 진급하지 못했으니 당신 정성이 부족했다며 나한테 미안하다고 했다.

나도 집안에 좋은 일이 있을 때면 항상 “어머니 덕분이어요. 기쁘시죠?”이런 말을 했었다. 하루에 4000만 번의 염주를 돌리며 ‘나무아비타불 관세음보살’ 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잖은가. 그런데 이런 영광이 당신의 가슴을 칠 줄은 몰랐다. 그 때의 우울증이 지금 치매의 시발점이 되지는 않았을까.

시어머니는 아들 며느리를 옆에 두고 TV만 보신다. 기어이 당신 손녀딸을 찾아내고야 말겠다는 기세다. 남편 휴대폰에 저장된 외손주들의 사진을 시모께 보여드렸다.

“이 아가들은 다 누구냐?”

“소영이네 애들이어요.” 소영이가 언제 결혼했냐며 통 기억이 나지 않는단다. 바보가 된 것 같다며 아무 걱정 없는 웃음을 웃으신다.

시모의 기분이 좀 좋아진 것 같아 다음 주에 또 오겠다며 일어서려는데 남편에게 “성아(兄)는 잘 있냐?”고 묻는다. 세월 앞에 장사 없다고 하지만 또 돌아오는 발걸음이 무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