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복순 윤약국약사

나는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미리부터 걱정을 하지 않는 편이다. 그때그때 닥치는 대로 최선을 다해 산다. 살아보니 죽으라는 법은 없다. 고생 좀 하면 되지 하고 일단 저지르고 보는 편이다. 미리미리 계획을 짜고 그 계획대로 살고 그래서 실수도 없고 그렇게 야무지게 사는 성격이 못 된다. 좌충우돌 그 상황을 즐기면서 산다.

무슨 일을 할 때도 쉬운 것부터 한다. 하다보면 어려운 것도 길이 생기고 요령도 터득하게 된다. 처음엔 엄두도 못 냈던 것도 쉬운 것부터 하나씩 하다보면 끝이 보인다. 먹는 것도 좋은 것부터 먹는다. 그래서 나는 항상 좋은 것을 먹고, 일도 쉬운 것부터 하다 보니 안 되는 일이 없다는 긍정적인 생활을 하는지도 모른다.

올 겨울 전북 4대 종교 성지순례길이나 걸을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천주교·불교·기독교·원불교 이렇게 4대 종교고 그 길은 총 240Km로 아홉 구간으로 나뉘어져 있다. 한구간은 25Km 이쪽저쪽이다.

성지순례길은 익산시·전주시·김제시·완주군에 걸쳐있는데 집에서 버스로 한 번에 갈 수 있는 구간은 두 구간뿐이다. 지명도 두 곳은 처음 듣는 곳이고 그곳이 어디쯤에 있는 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찾아보지 않았다. 모르고 기대하지 않았을 때 감동이 더 크기 때문이다.

학교 다닐 때도 예습은 잘 안하고 복습은 좀 하는 편이었는데 지금도 여행할 곳을 미리 알아보기보다는 다녀와 잘 모르는 것을 인터넷으로 복습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일단 집에서 버스 한 번에 갈 수 있는 곳에서 출발하기로 했다.

아름다운 순례길은 달팽이로 길안내를 하고 곳곳에 순례길 푯말이 돌에 새겨져 있다. 그런데도 길을 잘못 들기 일쑤다. 갈림길이나 헛갈리기 쉬운 곳에 이정표나 달팽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동네 개구쟁이들이 달팽이의 방향을 돌려놓았는지도 모르겠다. 가끔 전봇대에 철사로 달팽이를 달아 놓았는데 그 방향이 틀어져 있어 서너 번 씩 헛걸음을 했다.

두 번째 날이었다. 미륵사지에서 초남이까지다. 초남이가 처음 들어보는 곳 중 하나다. 어느 종교의 성지일까, 백지상태로 출발했다. 1시간쯤 걸었을 때 갈림길에서 원불교 총부와 삼정원 만경강이 반대방향으로 표시되어 있다. 중간 중간의 지명은 모르고 초남이만 알고 갔는데 어느 방향으로 가야 초남이가 나오는 지 알 수가 없다. 달팽이는 원불교 총부 쪽으로 되어 있다.

달팽이 따라 1시간이상 갔다가 되돌아 왔다. 삼정원에 도착했을 때는 12시가 넘었고 초남이까지는 24Km라는 표시가 있다. 너무 늦은 시간에 도착하게 되고 초남이에서 집에 오는 차가 없어 서너 번 갈아타야 하고 시내버스는 자주 없을 테니, 잠시 걸음을 멈췄다.

‘언제는 계획을 세워서 걸었더냐? 걷다보면 이루어지고, 포기하지 않으면 깨닫는다.’ 걷기로 했다. 거의가 하천의 뚝방길이다. 남은 거리가 얼마인지 표시가 하나도 없다.

만경강을 넘으면서 익산시에서 김제시가 되었다. 그런데 버스는 전주 시내버스가 와 있다. 처음 가보는 곳인데 어디쯤일까 짐작이 되지 않았다. 해는 뉘엿뉘엿 지고 있다. 깜깜하면 달팽이도 볼 수 없을 텐데.

10여 년 전 프랑스 파리에서 길을 잃었던 생각이 났다. 패키지여행에서 쇼핑은 필수코스다. 일행들이 명품가방을 산다고 얼마나 시간을 지체하던지 잠깐 나왔다. 버스를 타고 지나오면서 보았던 백화점의 디스플레이구경이나 가 볼 속셈이었다. 크리스마스를 앞 둔 때라서 여간 멋진 게 아니었다.

분명 버스는 백화점에서 일직선으로 와서 쇼핑센터 앞에서 멈추었다. 곧바로 갔다 그대로 돌아오면 되었다. 이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어 가이드에게 말도 없이 나갔다. 10여분 정도 걸어서 그 백화점을 찾았다. 백화점 밖에서 전시해 놓은 것만 보는데도 그 아름다움과 예술적 감각에 명품가방 구경하는 것보다 훨씬 황홀했다.

고대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 쇼핑센터가 나오지 않았다. 그 상점의 명함도 없이 나왔는데 앞이 캄캄했다. 시간상으로도 갈 때만큼 걸어왔다. 사거리에서서 사방을 쳐다보았다. 건너편 교차로에 버스의 뒤쪽이 약간 보였다. 우리 버스 인 것 같아 버스가 있는 쪽으로 왔다. 우리 버스가 아니다.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진정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우리 버스는 한참 앞쪽에 있다. 일행들은 그때까지도 나오지 않았다. 파리가 방사선형도시라고 학교 다닐 때 배운 생각이 났다. 제대로 체험했다.

타국에서도 아무 일 없었는데 같은 지역에서야 별 일 있을까 마음을 편하게 먹기로 했다. 해는 어느새 쏙 빠졌다. 다리가 아파 잠깐 지체하고 바라보니 차가 다니는 길이 보인다. 언뜻 시내버스도 보이는 것 같다. 찻길과 만나는 곳까지만 걷기로 했다.

신작로로 나왔을 때 익산 시내버스를 만났다. 1시간에 한 대나 다니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금방 만날 줄이야, 또 익산 시내버스를 만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이 버스의 시발점이 어디냐고 물으니 기사는 우리 아파트 뒤 시민공원이란다. 한 방에 집에까지 왔다.

초남이까지는 2~3Km쯤 남았다. 다음 일요일 이 버스를 타고 가서 그곳에서 내려 거기서부터 걸었다. 복잡하고 어려운 일도 이렇게 한 코에 해결이 되었다.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대로 하지 않아도 가끔은 기대 이상의 행운이 따라준다. 이것이 좌충우돌 여행의 묘미인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순례길 세 구간을 걸었다. 다음 일요일이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