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수훈

  미국 학자 새뮤얼 헌팅턴은 <문명의 충돌>에서 세계는 국가가 아닌 서구와 라틴아메리카ㆍ이슬람교ㆍ힌두교ㆍ유교ㆍ불교 등 7-8개의 문명들로 나누고, 국가 간 무력 충돌이 발생하는 것은 이념의 차이가 아니라 전통, 문화, 종교적 차이 때문이라고 했다. 익산도 유구한 역사 속에 크고 작은 문명의 충돌이 있었다. 그중 두 가지를 손꼽으라면 백제 수도 천도와 근대 철도건설이라 할 수 있다.

  첫 번째는 백제 사비(부여) 수도의 익산 천도로 문명의 충돌이 발생했다. 백제는 관산성 전투에서 신라에게 패배하고 제26대 성왕이 사망하였다. 이후 급속한 왕권 약화 속에 외적으로는 신라와 적대관계가 강화되고 내적으로는 호족 세력의 득세로 내우외환에 시달렸다. 제30대 무왕(600-641년)이 등극 후 수도를 사비에서 익산 왕궁으로 옮기게 되었다. 수도 이전은 사비 호족 세력의 반발과 지역 간 충돌을 불러일으켰다. 백제는 한성(서울)에서 웅진(공주), 사비(부여)로 세 번이나 수도를 옮긴 전례가 있었다. 무왕은 네 번째 천도가 쉽지 않았지만 강단지게 실행에 옮겼다.

  이는 익산에 신라 공격의 전략적 요충지를 확보하고 6좌평 견제로 왕권 강화란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한 포석이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무왕은 금마 태생이라 전해진다. 고향에 왕궁을 건설하여 백제 부흥을 위한 웅대한 꿈을 더 키우고자 하지 않았을까? 백제 변방인 왕궁ㆍ금마는 수도 요건인 왕궁, 사찰, 성, 왕릉이 갖추어지면서 중앙무대에 우뚝 서게 되었다.
  왕궁?금마는 백제가 660년에 멸망한 후에도 익산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등 중심지로서 자리매김을 해왔다. 미륵사의 미륵신앙이 지역 사상의 기반이 되었고, 사찰은 조선 초까지 이어져 내려왔다. 국보 미륵사지 석탑은 1,370년의 모진 풍파를 견뎌왔다. 2009년 심주석에서 사리장엄구가 출토되면서 대한민국의 보물이 되었다. 왕궁리유적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왕궁터가 고스란히 발굴되어 백제 건축예술과 고대 한·중·일 문화교류의 진수를 선보였다. 미륵사지와 왕궁리유적이 201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12번째로 등재되면서 세계문화로 각광을 받고 있다.

  두 번째는 일제강점기 불모지 이리에 철도건설로 문명의 충돌이 있었다. 1910년대 초기 구한말 유교문화와 일본제국주의가 맞부딪치면서 근대 철도가 등장했다. 경북대학교 김경남 교수는 논문 <제국의 식민지 교통 통제 정책과 이리 식민도시 건설>에서“총독부는 전북평야의 쌀에 주목하여, 일본 본토 철도-부관 연락선-부산항-군산항-군산선(1912년)-이리역(1912년)-호남선(1914년) 및 전북 경편 철도(이리-전주선, 1914년)-전라선(1936년)으로 이어지는 제국과 식민지의 교통체계를 정비하였고, 이리 식민도시 건설 작업을 추진하였다”라고 했다. 이리는 일본의 쌀 수탈을 위한 식민지 계획도시이자 중국침략을 위한 호남 내륙 전략기지로써 조선의 전통문화 파괴 속에 탄생한 신흥도시라 할 수 있다.

  이리역 주변, 영정통(현 평화동)에 일본인 거류지가 생겨났다. 조선인들도 사통팔달 철도교통 요지에 일본인 농장 주변의 일자리를 찾아 속속 모여들었다. <이리안내>를 쓴 야마시타에 따르면 이리는“옛날의 기피촌에서 선호지역으로 변화하여 격세지감을 느낀다”라고 할 정도였다. 1911년 익산군청 소재지가 군내면(지금의 금마면)에서 남일면으로 이전되었다. 무왕 이후 1,270년 동안 익산 중심축이었던 왕궁?금마 시대가 저물고 이리가 새 문명지로 떠올랐다. 시내 지역의 근대 등록문화재이자 적벽 돌의 상징인 익산 구 익옥수리조합사무소 및 창고, 익산 구 이리농림학교 축산과 교사, 익산 주현동 구 일본인 대교농장 사무실 등이 영광스러웠던 흔적을 말해주고 있다.

  1916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서 솜리가 이리로 바뀐 후, 이리읍(1931년)-이리부(1947년)-이리시(1949년) 및 익산시(1995년)로 행정 통폐합 과정을 거쳐 오면서 호남 제3의 도시로 성장해 왔다.

  세계유산 왕궁리유적과 미륵사지는 고대 동아시아 문명 발달의 절정을 보여주는 탁월한 가치를 지닌 유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익산 문명이 왕궁?금마에서 옛 이리로 이동된 후, 다시 왕궁·금마의 백제 문화재가 발굴·복원되고 국립익산박물관의 설립으로 부활하고 있다. 또한 일제강점기 근대 철도는 산업화 이후 복선화되고, 2015년에 호남고속철도가 개통되었다. 익산역은 유라시아 철도 시대를 견인해 갈 동아시아 출발역이자 새만금 경제 물류 배후도시로 급부상하였다.

  역사는 도전과 응전이라 했다. 익산을 대표한 두 도시인 고대도시 금마·왕궁과 근대도시 이리가 문명의 대충돌 속에 탄생하였다. 전혀 이질적인 것 같은 두 지역이 이제는 백제 세계관광문화와 새만금 물류 전초기지로서 익산을 이끌어 나갈 양축이 되었다. 명실공히 익산 미래의 성장동력이 될 쌍두마차가 된 셈이다. 이 두 문명권이 손을 맞잡고 하나로 꽃피워 나갈 여건이 조성되었다. 고·근대 문명의 조화 속에 세계적인 관광문화인 백제 왕도와 유라시아 철도 시대 도래를 꿈꾸며 헬레니즘처럼 제3의 익산 통합문화가 창조될 수 있도록 힘차게 웅비해 나갔으면 한다.

약력
- 익산시 황등 출신
- 원광대학교 및·동 대학원 사회복지학과 졸업
- 익산시 복지정책과, 맞춤형복지지원계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