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복순 윤약국약사

나이를 먹으면 어린애가 된다고 한다. 남편도 나도 예외는 아닌 모양이다. 약국 문을 닫을 시간인데 요란하게 전화가 울려 받으니 아들이다.

“엄마, 심적으로 고통스러운 일 있어요?”
“아니, 왜? 아빠가 엄마 이빨 아프다고 전화 했어?”

20여일 가까이 치과 치료를 받고 있다. 잘하는 것이라고는 밥 잘 먹는 것 밖에 없는 난데 이가 아프니 영 밥맛도 없고, 밥을 못 먹으니 기운도 없고 재미도 없다. 남편하고 둘이 사는데 주부가 이러니 남편인들 밥맛이 나고 재미가 있겠는가.

임플란트한 이가 아픈 것 같은데 치과의사인 동생은 반대쪽 잇몸이 아픈 것이라고 한다. 원래 임플란트는 남의 것이라 통증을 못 느끼고 이상이 있으면 그냥 쏙 빠진단다. 동생이 진단을 잘못한 것 같아 며칠을 기다려 봤다. 더 아프고 시리기까지 해 물도 못 먹고 양치도 못 하겠다.

보다 못한 남편이 동생한테 전화를 해 느네 누나 왜 치과에도 안 가고 저러냐며 사랑니 뽑으라고 하니 무서워서 못 가는 것 같다고 한 모양이다. 사랑니 뽑다가 죽은 사람도 있다고 해 나는 사랑니 뽑는 것 정말 싫어한다.

남편이 포도밭에 나가는 것도 미루고 치과에 끌고 가다시피 나를 데리고 갔다. 다시 진찰을 하더니 임플란트한 옆니에 이상이 있어 신경치료를 받으면 된다고 한다.

며칠 전이다. 매일 약국에 나오는 성이, 당신 수양딸이 데리고 나가 봄꽃 구경도 시켜주고 점심도 사주고 운동화도 사줬다며 자랑을 했다. 직장에서 만났는데 20년도 넘게 가까이 지낸단다. 나도 안다. 가끔 약국으로 성을 모시러 올 때도 있다.

그 날 저녁 남편이 내가 이 때문에 고생하는데 애들이 전화도 안 하고 집에 내려오지도 않는다고 불평을 해, “여보, 우리도 수양딸이나 하나 만들까.” 성이 오늘 수양딸 자랑 많이 했는데. 멀리 있는 아들딸만 바라보지 말고 가까이에 하나 만들어도 좋겠지. 이런 농담을 했었다. 

사실 이 좀 아프다고 아들딸에게 전화 하는 것도 그렇고, 내려오라고 하긴 더 그렇다. 마침 며느리와 사위 생일이 가까워져 둘째 주말에 내려오라고 했다. 딸네는 좋다고 했다. 며느리는 토요일 외환거래 무슨 자격증시험이 있고 아들은 일요일 출근을 해야 한단다. 

셋째 주말은 내가 전국여약사대회가 있어 1박2일로 경기도 화성에 가고 일요일에는 남편도 결혼식이 있다. 넷째 주말엔 사위가 일이 있단다. 이래저래 4월엔 가족이 다 모이기가 어려울 것 같다.
애들이 내려오면 생일 축하도 해 주고 고창으로 고사리여행도 하고 풍천장어를 사 먹이려던, 남편과 둘이서 세웠던 계획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남편이 서운해 했다.

딸이 쌍둥이를 임신했다. 임신초기 하혈이 있어 5주 동안의 병가를 마치고 출근을 했다. 수업시간이 많아 하루 종일 서 있었더니 배가 꼿꼿하니 불편해서 고역을 치렀다며 힘이 없는 목소리로 전화를 했다.

나는 딸에게 다섯 아이의 엄마가 되려면 그렇게 약해가지고 되겠냐며 마음 단단히 먹으라고 했다. “나는 슈퍼맘이다”라고 최면을 걸라고도 했다. 그런 각오도 없이 네 번째 임신을 강행하진 않았을 것 아니냐고도 했다.

치과에 다녀 통증은 없지만 아직도 씹지는 못한다. 며칠 동안 밥도 못 먹고 밤에 잠도 설친 탓인지 비문증까지 나타났다. 남편과 함께 설거지를 하는데 내가 날파리가 날라 다닌다며 손으로 잡으려 하자 남편이 걱정스럽게 쳐다보았다.

나는 건강하다. 병원에 입원해 본 적도 없고 혈압 당뇨 같은 성인병도 없다. 장기적으로 먹는 약도 없고 전신마취니 이런 것도 해 본 적이 없다. 이런 내가 헛것을 보니 남편이 놀란 모양이다.

남편이 애들에게 문자를 보냈더란다. ‘자식들은 아프거나 걱정거리가 있을 때만 부모에게 전화를 하고 저희들 편 할 때는 무소식이다. 부모가 아픈지 어쩐지도 모르고 지낸다. 언젠가 엄마가 우리도 수양딸 하나 만들까 한 말을 곰곰 생각해 보게 하는 저녁이다.’ 뭐 이런 내용이었단다. 이 문자를 받은 아들이 놀라 전화를 한 것이다.

우리가 더 나이를 먹으면 정말 죽을병에 걸리게 된다. 그 때는 그 충격을 어떻게 받아들이려고 아내가 이빨 좀 아픈 것을 가지고 이렇게 호들갑을 떠느냐고 한 마디 해줬다.

나도 반성을 한다. 지금까지 건강하게 잘 살았으면 감사할 일이지, 삶의 질이 떨어진다는 둥, 밥상머리에서 맛이 없다는 둥, 이것도 못 먹겠다는 둥, 먹고 싶은 것도 없다는 둥, 온갖 야냥게를 다 떨었다. 병에서 오는 진짜 아픔이 무엇인지도 모르며 호강에 얄야리가 난 것이다.

아들에게 전화를 했다. 교무님이 수양딸 자랑을 해서 우리도 하나 만들까 했더니 아빠가 그렇게 쓴 것 같다. 이빨은 치료를 받아 많이 좋아졌으니 엄마 아빠 걱정 말고 너희들이나 잘 지내라. 항상 웃으면서 근무 잘 하고 OO이 시험공부 하는데 신경 좀 써주라고 했다.

남편이 문자를 보내기 바로 전에 딸과 통화를 했었다. 그것을 모르는 남편은 문자를 받고도 딸이 전화를 안 한다고 딸은 소용이 없단다. ‘딸네미 딸네미’ 하면서 예뻐할 때는 언제고.

애들이란 원래 아빠보다 엄마하고 더 친하다. 자연이 나에게 더 많이 전화를 한다. 남편은 그것도 시암을 낸다. 마치 어린애들이 부모가 동생을 예뻐하는 것 같으면 엉뚱한 짓을 하듯. 이 남자의 어린양이 어디까지 뻗칠지 걱정이다. 나이는 먹어가고 더 어린애가 되어 갈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