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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는 날의 단상

윤복순 윤약국약사

어렸을 때 비가 오면 고기를 잡으러 갔다. 우리 동네는 고라실이라서 논은 모두 천수답이고 방죽이 있어 그 물로 모내기를 했다. 그 방죽으로 통하는 조그만 똘이 있었는데 평소에는 아주 적은 물이 고여 있거나 말라 있을 때도 있었다. 장마가 지면 방죽의 수문을 열어서 그곳에 물이 흘렀다.

얼레미를 쳐 놓고 양쪽 가를 흙더미로 막고 풀을 뜯어 얼레미와 흙 사이에 꽂아 똘두덕 같이 위장했다. 물고기들이 물을 따라 올라가다 가득가득 잡혔다.

어머니는 옷 버려다놓는다고 고기 잡으러 못 가게 했지만 나는 비만 내리면 몰래 빠져나가곤 했다.

얼레미 안에서 물고기들이 팔딱팔딱 살아있는 소리도 좋았지만, 조용히 물속을 들여다보면 송사리들이 물길 따라 올라오는 모습이 보여 그들을 바라보는 정중동(靜中動)이 더 좋았다. 무리지어 올라오다 얼레미 입구에서 더러는 망설이고 사려가 깊지 못한 놈들은 쑥쑥 들어가곤 했다.

결혼 후, 이런 경험이 전혀 없는 남편을 위해 비가 오는 날 앞 방죽으로 물고기를 잡으러 나갔다. 나의 똘은 오랜 공백에도 송사리며 붕어 등을 한 대야씩 잡게 해 주었다. 남편이 더 신났다. 이런 고기 잡기는 아이들이 대여섯 살 될 때까지 이어졌다.

늦게 배운 도둑이 밤새는 줄 모른다고 친정에만 가면 남편이나 아이들은 고기 잡으러 가자고 야단이었다. 똘은 비가 와야만 흐른다는 것도 모르고.

언제부턴가 친정 동네에도 개발 붐이 일었다. 때맞춰 농약이니 풀약이니 이런 것들도 사용했던 것 같다. 자연이 물고기들도 자취를 감추었다. 물고기 잡기가 애들이 외갓집에 가는 재미 중 하나였는데.

우리 동네는 전기도 들어오지 않고 우리 집에는 라디오도 없었다. 태엽을 감는 그야말로 밥을 주는 시계만 큰방 벽에 걸려 있었다. 촌에서 시내 중학교로 진학을 해 기차 통학을 했다. 기차역까지는 걸어서 1시간 정도 걸렸다.

통학차를 타기 위해서는 새벽에 나가야 했다. 6시쯤이었을 것이다. 그 기차를 놓치면 학교에 갈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아침마다 잠과의 전쟁이었고 어머니가 깨워주면 허둥지둥 일어나 정신없이 밥을 먹고 시간 맞춰 출발해야 했다. 일어날 때 게으름이라도 피우면 아침도 굶고 가야 하니 기차시간에 대한 강박관념이 생겼다.

가을이었다. 일요일이었는데 오후부터 비가 내렸다. 시험공부를 하다 잠이 들었다. 얼마를 잤는지는 모르는데 시계가 기차 타러 나가야 할 시간을 가르치고 있었다. 어머니도 부엌에서 부산하게 식사 준비를 하고 계셨다.

“빨리 도시락 도시락”을 외치며 겨우 세수를 하고 책가방을 챙겨 나왔다. 정신없이 뛰어가면 간신히 기차를 탈 수 있을 것 같았다. 시간에 맞춰 깨우지 않은 어머니에 대한 불만으로 도시락도 넣지 않고 대문을 나섰다. 고샅을 벗어나려고 할 때서야 새벽이 아니라 저녁임을 알았다. 나를 놀려주려는 식구들의 몰래카메라였다.

중 3학년 때다. 7월이 될 때까지 모내기를 하지 못했다. 몇 십 년만의 가뭄이라고 했다. 우리 논은 텃논으로 동네 앞이 모두 우리 것이었다. 비가 오지 않으면 모 한 포기도 심을 수 없는 고라실논이다. 앞 방죽과도 거리가 멀어 그 물을 어떻게 돌려 쓸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방죽 아래의 논부터 모내기를 해 방죽도 말라있었다. 모를 심은 논들도 다 논바닥이 쩍쩍 갈라져 거북등 같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버지의 속이 까맣게 타 들어가는 만큼 나도 그랬다. 대학생 언니를 필두로 줄줄이 학생이었는데 하필이면 나의 고등학교 진학이 딱 걸린 해였다. 언니나 동생들은 중도에 그만 둘 수 없고 나는 한 해 늦춰 진학해도 되는 상황이었다.

눈만 뜨면 환히 보이는 논들이 백답으로 있는데 비가 올 기미는 보이지 않아 아버지의 근심은 하루하루 깊어만 갔다. 농사는 때가 있어 무작정 비가 올 때 까지 기다릴 수도 없다. 모내기는 늦어도 7월 상순 안으로 끝내야만 한다. 그래야 모들이 햇빛 받는 날 수를 채워 가을에 나락이 쭉정이가 아닌 알곡으로 익어간다.

아버지께서 결단을 내렸다. 몇 군데 지하수를 파기로 한 것이다. 그 경비가 대단하여 농사지어봐야 남는 것이 없다고 했다.

내일이 지하수 파기로 한 날이었다. 그 때는 일기예보라는 것이 있는 때가 아니었을 것이다. 밤중이었는데 언니가 깨워서 일어나 보니 비가 내렸다. 고등학교에 갈 수 있다는 생각에 잠을 자지 못했다. 내가 지키고 있어야 밤새도록 비가 내릴 것 같았다. 아버지도 밤새 한숨도 못 주무셨다.

비는 밤새도록 내렸고 다음 날도 내려 시암을 파지 않고 모내기를 했다. 아버지의 지치고 주름진 웃음도 볼 수 있었다. 식구들의 말소리가 높아지고 집엔 생기가 돌았다. 나도 한 해 쉬지 않고 가고 싶었던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올 해의 한발이 그 때 만큼이나 심각한 것 같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하여도 기후학적 가물을 막을 수는 없는가 보다.

일요일 포도밭에서 풀을 뽑는데 국지성 소나기가 내렸다. 두두두둑 두두두둑 하우스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심장을 쿵쿵 뛰게 하고 마음을 달뜨게 했다. 50여 년 전의 그날 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