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약국 / 윤복순 약사

아침에 출근하면 제일 먼저 눈을 추는 것이 고추다. 화분에 고추 두 모를 심었다.

아주 잘 자란 편은 아니지만 서로 의지하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비슷하게 고추를 달고 있다.

반듯하게 커가는 청소년처럼 보기 좋다.

약국에 큰 플라스틱 화분이 생겼다. 옆 집 것이다. 맨몸으로 있는 것이 아까웠다. 한 철로 끝나는 화분으로부터 흙을 모아 두었다. 그 흙을 큰 화분에 붓고 고추를 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가에 화분이며 양철통에서 고추가 잘 자라고 있는 것을 많이 보았다.

장날에 고추 한 포기만 사야할 텐데, 하나도 파는지 몰라 하루하루 날짜만 지나갔다. 이런 저런 푸성귀를 가져다주는 아주머니에게 물었더니 당신이 사다주겠단다.

한 나무만 잘 키우려 했는데 두 나무를 사다줬다. 그래야 둘이서 잘 자란다고 했다. 모아둔 흙으로 충분할 줄 알았는데 반밖에 채워지지 않았다. 아침에 공원으로 운동 갔다가 쓰레기통에서 비닐을 주워 흙을 담아 왔다. 마침 공원에 구절초를 심는다고 여기저기 파 놓았었다.

원래 있던 흙에 공원에서 가져온 흙을 붓고 고추 두 모를 정성을 다해 심었다.

며칠이 지나도 아직은 땅 맛을 모르는지 그대로였다. 애가 타서 동네 아주머니에게 얘기 했더니 비료 한줌을 가지고 왔다. 물에 비료를 녹여 불면 꺼질세라 놓으면 깨질세라 조심조심 부어 주었다.

일주일이 더 지나도 깨성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고추 잎이 누리티티 해졌다. 아무래도 비료를 많이 준 것 같았다.

어른들이 약국에 오면 고추의 증상을 말하고 이런저런 처방을 받아 보았다. 결론은 흙이라는 걸 알았다. 공원에서 가져온 흙이 완전 황토 흙으로 물 빠짐이 좋지 않았던 것이다.

화분을 엎어 위아래 흙을 잘 섞어 다시 심었다. 물 빠짐이 훨씬 좋아졌다. 며칠 후부터 고추 잎이 진녹색을 띠어가며 하루가 다르게 키를 키웠다. 언제 열렸는지 한 나무에 고추가 두 개씩이나 달렸다. 이제 고추화분은 귀물이 되었다. 옆집 아줌마도 “어머 고추 따먹게 생겼네.”하며 탄성을 보냈다.

몇 십 년만의 더위라는 이 더위에 무성하던 고추 잎이 시들시들 해졌다. 하기야 살인더위라는데 고추라고 편할 수 있겠는가. 그늘 밑으로 화분을 옮기자니 햇빛을 못 받아서 안 될 것 같고, 또 고민이 생겼다. 이틀에 한 번 주던 물을 매일 주기로 했다.

고추 잎이 시들시들해진 날 애들에게 전화를 했다. 며느리는 별 어려움 없이 근무 잘 하고 있으니 걱정 하지 말라고 했다. 며느리는 퇴근 후에는 독서실로 공부하러 간다. 과장 진급 시험을 위해서다. 그런데도 씩씩하게 말한다.

딸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이제 겨우 정신을 차렸다고 한다. 방학이라도 영재수업 때문에 학교에 간단다.

오늘은 내리 다섯 시간을 했더니, 어떻게 운전을 하고 왔는지 모르겠단다.  엄마한테 어린양 하는지 많이 지친 목소리다. 고추나 사람이나 더위에 지치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다.

목마른 고추나무에 물을 주듯 애들에게도 뭔가 기운 날 음식을 먹여야 될 것 같았다. 나는 음식을 만들 줄 모른다. 애들을 내려오라고 부르기에도 너무 더운 날씨다. 애들 통장에 돈을 넣었다. 남편에게 문자를 보내라고 했다.

며느리와 사위 휴대폰에 문자를 넣었다. “더위에 어떻게 지내니? 아빠 엄마가 10만원 보냈으니 맛있는 것 사 먹고, 기운 차려 빵끗빵끗 웃으며 근무 잘 하기 바란다.” 근무에 지장 줄까 점심시간에 보냈다.

바로 답신이 왔다. “저희들은 시원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아버님 어머님도 더위에 조심하세요. 감사합니다. 아버님 최고” 며느리는 역시 귀엽다. “아버님 저희들이 챙겨야 되는데 죄송합니다. 맛있는 것 사 먹고 근무 잘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사위는 말 수가 적은 편이다. 애들 문자로 남편은 더위도 잊은 듯하다.

고추 모에도 지난 번 주고 남은 비료를 물에 녹여 주었다. 이런 더위에는 사람이든 식물이든 영양분이 필요한 것이다.

비료를 먹고 난 후 고추가 서너 개씩은 더 열렸다. 이러다 약국의 명물이 되겠다. 처음 것은 빨간 물이 들어간다. 하얀 꽃도 많이 피었다. 이것들이 다 열면 고추농장도 될 것 같다. 고추가 내 발걸음을 자꾸 불러들인다.

퇴근할 때 보면 하루 종일 더위와 씨름하느라 지쳤는지 고추 잎이 축 쳐져 있다. “오늘도 더위에 고생 많았다. 이 물 먹고 잘 견뎌.” 물을 한 바가지 주며 작별 인사를 나눈다. 아침에 출근해서 보면 내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잎이 씽씽해져 있다. 이런 작은 기쁨으로 하루하루를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