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꼴찌 화이팅

윤복순 윤약국 약사

언제부턴가 나는 이런저런 모임에서 언니 소리를 듣게 되었다. 때로는 왕언니라 불리기도 한다. 일요일 산에 같이 다니는 멤버 중에서도 제일 나이가 많다. 나는 산에 오를 때 항상 꼴찌를 한다. 내가 정상에 오르면 일행이 다 오른 것이고, 내가 출발점에 되돌아와야 하루의 등산이 끝나는 셈이다.

나는 산에 오를 때 내 후배들보다 앞서고 싶은 생각은 없다. 중간에서 그만두는 일도 없다. 천천히 조금은 더디지만 그들 뒤를 따라간다. 그들이 내게서 위안 받고 자신감도 회복하길 바라면서.

며칠 전에는 전남 화순에 있는 옹성산을 다녀왔다. 옹기항아리 모양의 산으로 자연 그대로의 산성이라고만 알았다. 해발 600m 가 채 안 되는 산이다.

“이 정도쯤이야” 나는 쉽게 생각했다. 조금 오르자 <줄다리 코스>, <등반하강 코스>라는 푯말이 나왔다. 나는 어리둥절했으나 산악회 리본만 믿고 따랐다.

줄다리코스를 따르던 나는 훈련 장비를 만나고서야 군사훈련장소임을 알았다. 군부대 앞에서 옹성산의 위치를 물었던 기억도 새삼 떠올랐다.

나는 유격훈련을 실습하는 셈 치자고 덤볐다. 농담인 줄 알았던 남편이 겉옷을 벗어부치는 나를 보고 얼굴색이 달라졌다. 사실 속으로는 내가 더 떨렸는데.

암벽타기부터 시작했다. 세 가닥의 밧줄 중 가운데 줄을 붙잡았다. 후배들이 나를 보호한답시고 가운데 줄을 잡으라고 했다. 옆 후배들은 가볍게 밧줄을 타고 올랐다. 나는 처음부터 터덕거렸다. 내가 절반쯤 올랐을 때다.

“언니 괜찮아요?” 하며 저 위에서 손을 흔든다.

구슬땀을 흘리며 겨우겨우 암벽타기를 끝냈다. 산 넘어 산이라고 했던가. 암벽 위에는 흔들리는 줄사다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벌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암벽 밑을 내려다보니 줄다리 끝이 보이지 않았다. 무서웠다. 어지러웠다.

나는 정신을 수습하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래도 도무지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나는 등을 돌렸다가 다시 돌아섰다. 서너 발걸음을 옮기다 다시 한 번 나도 모르게 숨을 들이마셨다.

‘떨어져 죽은 사람은 없겠지….’ 훈련받다 죽은 사람은 없는 모양이다. 위험 표시가 없는 것을 보고 나는 안심했다. 눈을 질끈 감았다. 줄다리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밧줄을 힘차게 거머쥐었다.

한쪽 다리를 쭉 밀어 간신히 줄다리에 내려섰다. 무게 중심이 한쪽으로 실린 듯 줄다리가 흔들렸다. 그러나 무사했다. 한 칸을 내려섰다. 또 한 발을 내려세웠다. 그러나 내 다리가 얼마나 짧은지 줄다리 발판에 닿지 않았다. 발판과 발판의 간격이 너무 넓었다. 허리를 쭉 펴고 다리를 힘껏 늘렸다.

“언니 조금만 더”

아무리 다리를 요동 쳐봐도 닿는 느낌이 없었다. 나는 더럭 겁이 났다.

턱을 줄다리 발판에 괴고 밧줄을 내려잡는 것과 동시에 다리를 쭉 내렸다. 발끝이 닿는 느낌이었다. 순간적인 동작이었을 것이다. 줄다리가 출렁 흔들렸다. 마치 공중그네를 타는 것 같았다. 덜컹 내 간이 떨어져 내렸다. 오금이 저리고 금방이라도 오줌이 나올 것 같았다. 이제 겨우 두 칸을 내려왔는데 말이다.

심호흡을 하며 아찔한 정신을 수습했다. 마지막 칸에서 발을 땅바닥에 내려놓는 순간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헛구역질이 나왔다.

얼마나 지났을까.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다른 사람들은 v자형 계곡을 연결한 공중 그물망을 두 개나 건너 내 쪽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나는 그 그물망을 통과하는데 반 시간도 더 걸렸다. 나를 향한 박수소리가 요란했다. 저 밑에서 남편이 엄지손가락을 우뚝 세워 흔들고 있다.

내게 시간은 아무것도 아니다. 해냈다는 것이 중요하다. 더구나 한사람의 낙오자도 없이 끝낸 유격훈련이 고맙다. 그 끝마무리를 내가 해낸 것이다. 만약 나만 못했더라면 우리들의 성취감은 반감됐을 것이다. 그들은 나 때문에 기쁜 마음도 내색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하이파이브를 날리며 자축했다.

텔레비전에서 여학생들의 병영체험을 보며 나도 한번 해보고 싶었었다. 그날 나는 모든 코스를 완주한 것은 아니다. 생각지도 못한 유격훈련으로 나는 마치 여고생이라도 된 듯 기분이 좋았다. 언니든 왕언니든 아직은 할 수 있음에 감사한다. 비록 꼴찌일지라도.

몇 해 전 전군벚꽃마라톤대회 때다. 나는 하프코스를 뛰었다. 반환점을 돌고부터는 영 뛸 수가 없었다. 다리가 아픈 게 아니라 겨드랑이며 허벅지 겹치는 부위가 마찰로 인해 물집이 생겨 너무 아팠다. 뚱뚱한 것이 문제였다.

뛰지 않고 걷기로 했다. 구급차며 행사진행자가 내 옆으로 오더니 차에 타라고 했다. 나는 끝까지 걸어서 결승점에 도착했다. 물론 그때도 꼴찌였다. 그때 어떤 젊은이가 동행했었다. 그 젊은이가 계속 뒤따르는 나를 보며 용기 내어 포기하지 않았다고 했다. 나는 꼴찌 했다는 것이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나이 많고 뚱뚱하고 숏 다리라 해도 다른 사람에게 자신감과 용기를 줄 수 있는 내가 얼마나 아름다운가. 어설픈 이 유격훈련 체험이 나는 소중하기 그지없다. 이런 꼴찌라면 언제라도 하고 싶다. 꼴찌 파이팅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