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고 있어도 언제나 봄은 다시 찾아옵니다. 이상화 시인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거창한 시국 담론을 읊지 않더라도, 겨울에 빼앗긴 삭막한 우리의 마음에 다가오는 봄을 마중 나가고 싶습니다. 이렇게 추운 겨울이 지나면 희망찬 봄이 찾아온다는 자연의 순리 앞에 다시 한번 자연의 경이로움과 위대함을 깨닫게 됩니다. 봄볕이 하루하루 짙어져 가니 곧 천지가 새봄이겠지요.

이번 겨울은 유난히 길게 느껴졌습니다. 혹독한 날씨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의 혼란과 갈등이 우리 사회를 겨울왕국으로 만들어가는 듯했기 때문입니다. 최근에는 난방비 폭탄이 터지고 물가가 상승하면서 우리네 마음을 더 얼어붙게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분명히 봄은 옵니다. 꽃샘추위가 와서 봄을 시샘하더라도 봄이 온다는 것이 분명한 진리입니다. 겨울 속에 봄이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 깊이 기다린 봄이 아주 가까이에까지 왔습니다. “꽃샘추위에 시달린다면 너는 곧 꽃필 것이다”라는 류시화 시인의 시 한 구절도 공유하고 싶습니다. 겨우내 땅속 깊숙이 움츠렸던 기운이 꿈틀대기 시작하니 꽃들이 이 기운을 놓칠 리 없습니다. 너도나도 잎 다퉈 꽃망울을 터트리겠지요. 부디 남북분단으로 빈사상태에 빠져있던 한반도에 ‘얼음이 녹고, 꽃피는 소리’가 들리기를 다시금 소망해 봅니다.

호주에 사는 교민이 고국을 다녀가는 길에 개나리를 가져다가 집 앞마당에 옮겨 심었습니다. 이듬해 봄, 호주의 맑은 공기와 좋은 햇볕 덕분에 가지와 잎은 한국에서보다 더 무성했지만, 꽃은 피지 않았습니다. 첫해라서 그런가보다 여겼지만 2년째도 3년째도 꽃은 여전히 피지를 않았습니다. 비로써 알게 된 사실은, 한국처럼 혹한의 겨울이 없는 호주에서는 개나리꽃이 아예 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겨울철 혹독한 추위를 이겨내야지만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고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을 춘화 현상(春花現象)이라고 합니다. 철쭉, 개나리, 진달래 등, 봄에 피는 꽃과 작물이 모두 여기에 속합니다. 그런가 하면 봄보리에 비해 가을에 파종하여 겨울을 나는 가을보리의 경우 수확도 맛도 더 좋다고 합니다. 개인을 떠나, 나라의 흥망성쇠도 춘화 현상과 무관치 않은 것 같습니다. 인생과 역사의 눈부신 꽃도 혹한을 거친 뒤에야 피기 때문입니다.

하루 중 가장 어두운 시간은 해뜨기 바로 직전의 시간입니다. 밤이 깊다는 말은 아침이 멀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봄을 그리도 좋아하며 기다리는 까닭은 겨울이 혹독하게 춥기 때문이겠지요. 만약 겨울이 춥지 않다면 봄도 조금은 덜 반가울지 모릅니다. 인생의 고난과 행복 역시 마찬가지라고 믿습니다. 그저 아무런 어려움이 없는 삶이 과연 행복할까? 심리학자 칼 융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느 정도 어둠이 있어야 행복도 존재한다.”

봄은 생명의 계절입니다. 봄을 spring으로 부르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새 생명을 태생케 하여 성장시키는 용수철의 계절입니다. 동결의 암흑과 긴장에서 풀려나 신선한 햇살 속에서의 약동은 곧 생명의 희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봄은 자연만의 계절이 아니라 인간의 희망과 꿈도 약동하는 계절도 되어야 합니다. 다시 새로운 희망의 꽃을 피우기를 기대합니다.

지난해 3월 9일은 수많은 약속이 있었던 대통령 선거일이었습니다. 대선 1년을 맞아 조사한 여론을 보면, 우리 사회는 더 나빠졌고 대선 때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는 의견이 많습니다. 여기저기서 들리는 말도 안 되는 가짜뉴스와 사건, 사고들이 갈등과 분열의 겨울을 더 길게 할지도 모른다는 걱정도 듭니다. 그런 거짓을 생산하고 조장하는 사람들도 문제지만 또 사실을 직접 알아보지도 않고 무조건 믿고 따르는 사람들도 문제입니다.

그러나 봄을 이기는 겨울은 없습니다. 하지만 봄은 그냥 날씨가 따뜻해져서 오는 게 아니라 꽃송이 하나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매화가 됐든, 목련이 됐든 분명히 제일 먼저 핀 자그마한 꽃송이 하나로 봄이 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꽃송이 하나 피우기 위하여, 희망을 기다리기보다는 자기가 먼저 희망의 도구가 되려고 하는 사람! 전쟁의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 한복판에서 먼저 봄노래를 부르며 생명과 평화의 길을 걸으려고 하는 사람이 정말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이 아닐까요?

겨울은 영원하지 않고 봄은 자기 차례를 건너뛰지 않습니다. 겨울에 잎이 없음을 한탄할 것인가, 아니면 조금 후에 있을 꽃을 설렘으로 환영할 것이냐는 전적으로 나무의 몫입니다. 봄은 새 생명의 부활이니 우리 삶에 달콤한 봄기운이 스며들어 환호를 부르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 반목하고 갈등하는 작금의 세상, 두텁게 드리운 갈등과 불신을 거둬내기 위해 따스한 배려와 화해의 힘이 온 천하에 두루 작동하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