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복순/윤약국 약사

공주는 정실왕비가 낳은 임금의 딸이지만, 우리는 흔히 집에서 귀하게 자라거나 외모가 예쁜 여자를 비유적으로 공주라고 한다. 우리 약국에 오는 멋쟁이를 공주성<兄>이라고 부른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누구도 공주라는 말에 이의를 달지 않는다. 예쁘고 멋있고 패션리더답게 무슨 옷을 입어도 썩 잘 어울린다. 그 옷에 맞는 핸드백과 구두와 액세서리로 뒷마무리를 해 그녀가 나타나면 그 주변이 환하다.

나하고는 전혀 코드가 같지 않은데 우리는 친하게 지낸다. 나는 화장기 없는 얼굴에 커트머리, 일하기 편한 복장과 운동화, 집에서 약국으로 약국에서 집으로 필요한 것을 넣어야 하기에 큰 가방을 가지고 다니는 편이다. 액세서리는 거리끼어 아예 없다. 손톱도 기르지 못한다.

칠십을 훨씬 넘겼는데도 언제나 화장을 곱게 하고, 문밖을 나오면서도 옷을 차려입고 나오는 할머니가 있다. 걸음도 반듯하게 걷고 살림도 잘 하신다. 자주 반찬을 만들어 가지고 나오신다. 모두 내 입에 맞고 깨끗하다. 손톱엔 항상 매니큐어가 칠해져 있을 뿐 아니라 예쁘게 손질되어 있다. 천상 공주과다.

몇 년 전이다. 공주는 공주를 알아보는 걸까. 그들은 약국에서 처음 만났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둘이는 옷이며 구두며 핸드백이며 이야기가 잘 통했다. 금방 친해졌다. 나는 가끔 식사를 같이 하는 자리를 만들었다.

약국에 매일 들르는 교무님과 공주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날도 공주들은 예쁘게 차리고 나왔다. 그 자리에서 교무님이 공주성에게는 영 프린세스, 할머니에겐 올드 프린세스라고 명쾌하게 이름을 부쳐주었다.

교무님과 나는 멋과는 거리가 멀고 살림도 못한다. 우리는 책과 여행에 대한 얘기를 자주 나누는 편이다. 가끔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며 웃기도 잘 한다.

“성, 나도 공주하면 안 돼?”

“너는 골드공주지.”

나는 요리도 못하고 하루 종일 약국에만 있다 보니 세상 물정을 잘 모른다. 생활정보에도 민감하지 못하다. 동네사람들이 두고 먹을 양파는 어떤 것이 좋고, 감자는 어느 때 사고, 어디에 뭐가 생겼다는 둥 얘기를 나눌 때면 나는 처음 듣는 얘기가 많다.

“그래요? 나는 몰랐는데.”

“골드공주가 뭘 알겠니.”

교무님은 이렇듯 나를 타박해 웃곤 한다.

사실 교무님은 나보다 모르는 게 더 많다. 결혼도 안했지, 아이도 안 낳아봤지, 애들 학교도 안 보내봤지. 남편이니 시댁이니 그런 것도 모르니 무슨 세상살이를 알겠는가.

“성, 성도 공주여.”

“내가?”

“다이아몬드공주, 성이 나보다 세상 더 모르잖아.”

이래서 우리는 공주 4총사가 되었다.

올드공주님은 틈만 나면 먹을 것을 가지고 나온다. 약국에서 이것저것 만들어 먹을 수 없으니 당신이 챙겨 먹여야 한다는 지론이다. 청국장 끊였다고, 개두릅 무쳤다고, 열무김치 담았다고. 이러다 할머니네 살림 남아나지 않을 것 같다. 복스럽게 먹는 모습이 예쁘다며 좋아한다.

영공주는 옷이며 핸드백을 준다. 며칠 전에도 고급 핸드백을 지갑 속에 2달러 지폐까지 넣어 세트로 맞춰서 줬다. 자주색이다. 내 백들이 검정색 일색이라서 마음먹고 준 것 같다. 그레이스켈리가 프랭크시나트라로부터 2달러 지폐를 선물 받은 후 모나코 왕비가 되자 이 지폐가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속설이 생겼다는 설명도 잊지 않았다. 분명 나에게도 행운이 올 것 같다.

다이아몬드공주는 여행을 좋아한다. 그 지방 특산물을 사다준다. 서산 갔다 오는 길이라며 6쪽마늘을, 파프리카농장에선 파프리카를, 한산에선 모시송편을, 대천에선 갑오징어를 등등. 늙은이에게 기 뺐기니까 잘 먹어야 한다며 이렇듯 챙겨주신다.

나는 그들에게 해주는 게 없다. 언제나 똑같은 모습으로 약국 문을 열어놓고 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웃고, 걱정을 같이 하고, 그들과 친하게 지내는 사람을 나도 좋아하고, 내 일같이 기뻐해주는 것뿐이다. 가끔 그들이 알고 싶어 하는 것을 신문이나 인터넷을 뒤져 읽어주기도 한다. 나는 제일 어리기 때문에 그들에게서 삶을 배우고 인생을 알아간다. 그런데도 그들은 항상 나에게 고맙다고 한다.

다이아몬드공주가 비닐봉투를 내밀며

“박 선생이랑 저울로 달아서 똑같이 나눠 먹어라”고 한다. 스위티다. 당신도 누구한테 선물 받은 것을 기어이 주고 간다. 나는 매일 이런 정을 받으며 살고 있다. 어찌 감사하지 않으리.
우리는 육칠십대 공주들이다. 건강하고 많이 웃으며 정이 넘쳐나는 공주4총사로 쭉~ 지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