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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회

윤복순 윤약국 약사

예쁜 아가씨가 이런저런 상비약을 찾는다. 나는 그녀가 장거리여행이라도 가려는 줄 알고 될 수 있는 대로 부피를 줄여 주었다.

“해외여행 가요?” 남자친구가 군대 갔는데 면회 가려고 한단다. 나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이 실렸다. 조그만 약상자를 찾아 포장하기 좋게 도와주었다.

삼십년하고도 칠팔년 전이다. 나도 내 남자친구 면회를 갔었다. 경북 울진으로. 그 당시는 이리에서 울진까지 가는데 하루 종일 걸렸다. 모처럼 연휴라서 무작정 떠났다. 좀 놀래줄 겸해서. 시간을 아끼기 위해 대전 큰언니 집에서 자고 첫 차를 탔다.

대구에서 얼마를 기다려 포항 가는 버스를 탈 수 있었고, 포항에 도착했을 때는 많이 지쳐 있었다. 울진행 버스로 갈아타니 동해 바다가 차창 밖으로 펼쳐져 조금 피로가 풀렸다. 그것도 잠시, 한없이 지속되는 비포장도로는 바다의 낭만을 다 빼서 가고도 모자라 심한 멀미를 하게 했다.

부대 앞에서 내려 정신을 수습하고 있는데 군인들이 쭉 나오고 있었다. 가던 날이 장날이라고 했던가.

그 무렵 삼척 울진지구에 무장공비가 나타나 전국이 시끄러울 때였다. 무장공비의 행방을 알 수 없어 숨을 만한 곳을 수색하라는 명령을 받고 수색작전에 참가하는 중이라고 했다. 내 남자친구는 소대장으로 소대원을 인솔하고 있었다. 총, 수류탄, 무전기 등등 완전무장을 하고서.
나는 남친의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운동화로 바꿔 신었다. 아무리 운동화 끈을 조여도 커서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구멍가게에 들러 고무줄을 사 신발을 묶고 소대원들 뒤에 따라 붙었다.
목적지는 태백산 삿갓재였다. 해발 700~800m가 넘는다. 빽빽하게 산림이 우거진 곳이다. 언제 어디서 무장공비가 나타날지 모르는 숨 막히는 불안함의 연속이었다. 나는 긴 시간 차멀미에 시달려 몸 상태도 말이 아니었다.

적막강산이라는 말이 실감났다. 그 넓은 산에 바늘이 떨어져도 그 소리가 들릴 것 같은 긴장감이 피를 말렸다. 애인 얼굴을 봤으면 됐지 뭐 하러 따라 나섰던가. 후회도 잠깐, 내가 부담을 주면 안 될 것 같아 피곤한 내색도 하지 못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여자도 오르는데” 하며 소대원들이 잘 따라 주었다고 했다.

산을 일구고 살았던 집 한 채가 있는데 무장공비 때문에 집을 비웠는지 아무 인기척이 없었다. 혹시나 그곳에 공비가 숨어있을지 몰라 그 앞을 지날 때는 머리가 쭈뼛쭈뼛 섰다. 명령받은 곳을 수색하고 내려오다, 화전민들이 모여 살고 있는 산동네에 도착했을 때 눈물이 핑 돌았다. 이제는 살았다는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큰 숨을 몰아쉬었다.

그 동네사람들이 군인들을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온 듯 반갑게 맞아 주었다. 무장공비 때문에 며칠째 바깥출입도 못하고 마음 졸였다고 했다. 고맙게도 그들이 우리에게 늦은 저녁밥을 차려 주었다. 정말 쌀은 한 톨도 없고 조, 옥수수, 보리, 수수, 콩 등 밭에서 나는 곡식으로만 지은 밥이었다.

군인들은 주민들을 지키기 위해 동네 한쪽에 텐트를 치고 잤다. 나는 여자라고 특별히 동네 최고 어른 댁 안방에서 할머니랑 같이 잤다. 그러나 첩첩 이 산중 어딘가에 공비가 숨어있을 것 같아 뒤척거리다 날이 샜다.

군인들이 고생 많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어머니들이 아들 군대 보내면서 우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하룻밤 새 나는 많이 성숙했고 애국자가 되어 있었다.

부대로 돌아오는 길엔 길을 잘 못 들어 몇 번을 오르고 내린 것 같은데 그곳이 그곳이었다. 하기야 어디 길이나 있었던가. 산 속에서 해는 갑자기 쏙 빠지고 배도 고프고 피로가 밀려와 눈이 슬슬 감겼다. 소대장 애인으로서 체면은 지켜야겠는데.

무전기가 바빠지고 부대에서 예광탄을 쏘아 주어 방향만 잡아 나뭇가지에 찢기며 겨우겨우 내려왔다. 부대에 도착했을 때는 밤 10시가 다 되었고 중대의 모든 군인들이 열렬히 환영해 주었다.

젊음은 때때로 무모함을 부른다. 아무 탈이 없었으니 망정이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기 그지없다. 가끔씩 군인들이 수색작전을 펴는 장면을 TV에서 본다. 그럴 때마다 나는 죄인처럼 고개를 들 수가 없다. 그때, 소대장이 긴박한 수색작전을 나가면서 애인을 데리고 갔다는 것을 윗사람이 알았다면 내 남편은 남한산성으로 직행했을 것이다.

큰 죄를 짓고 아무에게도 말 못하고 가슴에 묻어 두었던 비밀을 이렇게 공개하는 것은 지금쯤 공소시효가 지났을 것 같아서이다. 아니, 그보다는 내 나이가 어느새 젊은 날의 만용을 보듬을 만큼 되었기 때문인가 보다.

나는 아가씨에게 안 해도 될 말을 한 마디 했다.
“면회 오라고 약속된 날에 가요.”

별 걱정을 다 한다는 듯 멋적게 웃고 나가는 젊음이 당차고 예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