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복순/윤약국 약사

출근 길이었다. 한 달여 만에 만난 동네 아줌마가 나보고 좀 날씬해진 것 같단다. 오늘 아침 똑같은 체중임을 확인했으면서도, 나는 속없이 그 한 마디에 마냥 즐겁다.

적절한 때에 적절한 말을 하려면 얼마나 많은 노력과 공부가 필요할까. 하기야, 말은 마음을 표현하는 것인데 훈련과 연습보다는 마음을 잘 다스리는 것이 더 중요하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시어머니께서 오랜만에 약국에 나오셨다. 그때 마침 친하게 지내는 동네 성(兄)이 와 있었다.

“어떤 복 많은 어르신이 우리 윤 약사 같은 며느리를 봤을까 한번 뵙고 싶었어요.”

“우리 며느리는 부처님이 보내 주셨어요.”

마음공부 많이 하신 어른들은 말씀도 잘 나누신다.  이런 극찬의 말을 내 감히 들어도 될까.

나도 상대방에게 좋은 점만 말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약국에 오는 손님 각자에게 맞는 말을 찾으려 고심할 때가 많다.  주근깨가 자글자글 한 중년 아줌마에게 은하수란 애칭을 지어줬다.  주근깨 하나하나가 모두 별이고, 그 별은 밤하늘에 보석처럼 빛나고, 그 보석이 내처럼 흐르는 은하수.  그녀는 성격이 외향성이고 자신만만하다.  몸도 마음도 건강하다.  그런 모습이 보기 좋다. 그녀는 은하수란 별명이 맘에 든다고 했다.

기분 좋게 해준다는 말이 때로는 실수가 될 때도 있다.  꼬마가 엄마를 따라 약국에 들어섰다.

“아이 예뻐, 여섯 살?”

순간 아이의 얼굴이 일그러졌고, 아이 엄마는 얼굴이 붉어지더니 그냥 나가버렸다.  무슨 실수를 했을까, 한 동안 마음이 편치 않았다.

며칠 후 그 애기 엄마가 약국에 다시 찾아왔다.  남편이 속을 썩여 가출한 적이 있다고 했다. 한창 키 클 나이에 애를 잘 먹이지 못 했다고 했다.  그날 아이는 물론 자신도 엄청 스트레스를 받았단다.  나는 혀를 깨물었다.

오래 전이다.  비교적 가깝게 지내던 후배가 그녀의 남편을 앞세우고 약국에 들어섰다.  남편이 국회의원에 출마한다는 것이었다.  이미 전라도에 황색 바람이 강타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는 상황이었다. 승산이 없음은 세 살 먹은 아이도 다 알 만 했다. 

고생 많겠다.  열심히 하면 좋은 결과 있지 않겠냐.  참신해서 좋다.  이런 말을 해 줬던 것 같다.  후배가 만났던 사람들은 대부분 나와 비슷한 말을 했을 것이다.  혹시 그렇게 말해주는 사람들을 후배는 모두 자기 표라고 믿지는 않았을까.

이로운 말은 귀에 섧다고 한다.  요즘 나는 쓴 말을 들은 지가 꽤 오래 된다.  나도 쓴 말을 가급적 피하는 능구렁이가 다 되었다.  진정한 친구가 없기 때문일까.  바른 말이 칭찬만큼 좋은 방법이 되지 못하기 때문일까.

꽉 끼는 청바지에 배꼽티를 입은 여학생을 붙잡고, 여자들이 아랫배를 따뜻하게 건사해야 하는 이유를 침이 마르도록 설명했었다.  젊은 애들의 유행병에 나는 속수무책이었다.  몇 번 시도하다 지치고 말았다. 

동네 할머니가 감기약 처방전을 받아 가지고 오셨다.  기운 없어 보인다고 하니, 입이 소태 씹은 것 같고 영 입맛이 없다고 하셨다.

“생태 탕 사드릴게 저랑 점심 같이 해요.”

“오늘은 경로당에서 먹는 날인데.”

단 둘이 먹는 것 보다 경로당 친구들과의 점심이 나을 것 같아 약만 지어 드렸다.  그날 저녁 때 할머니는 떡을 사 가지고 오셨다.  아무것도 보잘 것 없는 늙은이에게 밥을 같이 먹자고 해서 너무 고마웠다는 것이었다.  소인은 혀로 말하고 군자는 행동으로 말한다고 했던가.

약국 앞을 지나치던 시영이가 일부러 들어와 인사를 하고 간다.  참 잘 컸다.  수줍어 인사도 못 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유치원에서 배운 대로 합장을 하고 허리까지 굽혀 인사하던 모습이 귀여웠다.  인사를 예쁘게 잘 한다고 칭찬해 줬었다.  이제는 약국 앞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다. 

퇴근길에 슈퍼에 들렀다.  슈퍼 아줌마가 내 생일을 묻는다.  내가 복이 많아 보여 내 생일과 똑같은 날에 딸 하나 낳고 싶어서란다.  이미 회갑을 바라보는 아줌마다.  복은 무슨 복이냐고 하면서도 내 입은 벌써 귀밑에 걸렸다. 

진심을 담은 말, 듣기 좋은 말, 진심을 담아서 더 듣기 좋은 말.  나는 세 번째 말을 하고 싶다.  현명한 사람은 마음을 다스리는 말을 한다고 한다.  나도 마음 잘 다스려 적절한 때에 적절한 말로 진심을 담아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