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복순/윤악국 약사

중국 운남성에 다녀왔다.  나는 모르는 사람들과 한 팀이 되어 패키지여행을 즐기는 편이다. 

새로운 사람을 사귈 수 있고 여행에 대한 정보도 얻을 수 있고 긴장감도 있어, 알고 지내는 사람들과의 여행보다 한결 재미있다.  세 사람만 모이면 반드시 선생이 있다고 하니 일행이 현지의 날씨나 가이드만큼 중요하다.

이번 팀은 우리 부부를 포함한 부부팀, 솔로팀, 울산의 초등학교 동창팀, 합이 23명 이었다. 

솔로팀엔 우리 동네 성<兄>도 들어 있다. 최고령자는 팔십대 초반의 혼자 오신 할아버지였다.  그는 사관학교를 졸업한 영관 장교 출신으로 문화관광부 국장으로 퇴직했다고 했다.  전직 모 대통령과 중학교 동창이라며 잘난 척을 했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앞자리를 고수하며 가이드 설명에 마구 질문을 해 설명의 맥을 끊어 놓기 일쑤였다.

일행 중에 이런 사람이 있으면 나머지 사람들은 단합이 잘 된다.  그 사람을 왕따시키기 위해서 일 것이다.  초등학교 동창팀들이 뒷좌석을 점령하고 큭큭 웃음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뭐가 그리 재미있을까 잠깐 귀를 기울였다.

할아버지가 사관학교 나왔다고 자랑을 하니 동창팀 중 하나가 

 “나는 HID 출신이다.” (북파 공작원) 

 “나는 FBI.”

“그런 말 함부로 해도 되나.  비밀 안 새 나가게 조심해라 마.” 

 “괜찮다. 내가 CIA다.”

“잘들 논다.”  (약간 비웃는 톤으로) 

 “그럼 니는 뭔데?” (야간 언성을 높여)

"나? 나는 MRI다.  여행 오기 전에 다 찍어봤다 아이가.  깨끗하더라.”

여자 총무의 이 말 한마디로 버스 안은 초토화가 되었다.  동창팀은 심심할 만하면 이런 반전 유머로 일행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했다.

필리핀 여행 때의 일이 생각나 아무도 보지 않는데 나 혼자 얼굴이 빨개졌다.  나는 여행 때마다 목걸이 볼펜과 손 안에 쏙 들어오는 수첩을 챙긴다.  설명이나 느낌을 바로바로 적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마닐라는 남편이 군대에 있을 때 같이 근무했던 부하 직원들과 그 가족들이 한 팀이 되어서 갔다.  나만 열심히 적고 다니니 좀 달라 보였다.  군대 속성상 마나님이 남편보다 한 계급 높으니 그야말로 내가 대장이었다. 

나는 나이도 많고 그들보다 해외여행 경험도 많아, 그들이 미처 준비하지 못한 것을 나만 챙겨간 것들이 있었다.

필리핀 사람들은 야자를 부코라고 한단다.  부코파이는 코코넛의 하얀 속살로 만든 필리핀 전통 먹을거리라고 했다. 

어느 동네 것이 제일 맛이 좋아 줄을 서야 살 수 있다며, 가이드가 우리 일행에게 그 가게의 것을 사 준다고 야자 설명을 할 때 말 했었다.

팍상한폭포를 다녀올 때였다.  어느 거리에서 버스가 잠시 멈추고 가이드가 피자 비슷한 것을 사 가지고 와 나눠 주었다.  하얗고 따뜻하고 부드러우며 달짝지근한 맛이 괜찮았다.  다들 배가 좀 출출한 시간대여서 먹는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부코파이 맛 어때요?”

“어머, 이게 부코파이예요?  나는 계란 흰자파이인 줄 알았어요.”

일행들이 일제히 나를 바라봤고 가이드는 눈물이 글썽할 정도로 웃었었다.  에그, 빵 상자에 부코파이라고 쓰여 있지 않은가.

잘난 척이나 말걸.  아는 척이나 말걸.  수첩에다 메모나 하고 다니지 말걸.  나이 많다고 앞좌석에나 앉지 말걸.

그 때의 내 모습이 곤명 여행 때 맨 앞에 앉은 그 어르신의 모습과 흡사했을 것 같다.  상사 부인이라 대놓고 흉은 못 보고 뒤에서 얼마나 안주거리가 되었을까.

그 영감님이 우리 성이 혼자 온 줄 알고 자꾸만 이것을 준다 저것을 준다 하며 말을 걸었다. 

성이 당신을 잔소리쟁이라고 싫어하는 줄도 모르고, 틈만 나면 원불교에 대해 물으며 관심을 보였다.

토림을 구경할 때였다.  남편과 내가 사진을 찍는 사이 그 영감님이 성한테 사진 찍어 준다고 한 모양이다.  성이 큰소리로 “제발 뭐 준다, 사진 찍자 그런 소리 좀 하지 말라”고 했단다.  동창 팀 여자가 나에게 달려오더니 둘이 부부 싸움 한 것 같다고 알려줬다.  성은 원불교 교무님이시다.

여행을 다녀온 뒤에도 성은 매일 약국에 들른다.  여행 얘기를 하다 동창팀들이 성과 영감님이 부부인 줄 알았다고 하더라고 했더니 성은 앞으로 웃을 일 많게 생겼다며 웃었다.

여행 중엔 영감님 때문에 불편했는데, 돌이켜 보니 그 분 때문에 많이 웃을 수 있었다.  이번 여행에 일등 공신은 MRI가 아니라 그 영감님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