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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나기

윤복순 윤약국약사

무더위 때문인지 기운이 없고 지쳐서 이것이라도 먹어볼까 하고 만들었다며 동네 아주머니가 쑥미숫가루를 주고 갔다. 설탕을 넉넉히 넣어 큰 컵으로 한 잔 마셨더니 눈이 가벼워지고 힘도 난다. 쑥미숫가루는 시어머니도 당신만의 비법으로 잘 만드셨다.

이십년도 훨씬 전이다. 쑥 캐기는 우리가족의 연례행사 중 하나였다. 날씨가 아직 풀리지도 않았는데 시어머니께선 언제쯤 쑥을 캐러 가면 좋겠느냐고 물어 오곤 하셨다.

쑥 캐기는 시누이네 시동생네 식구들이랑 같이 했다. 그날 시어머니는 어미닭이 병아리들을 데리고 봄나들이를 가듯 넉넉하고 흡족하고 위풍당당하며 기분 좋은 표정이셨다.

그 날은 아침부터 부산하였다. 그릇이 크면 많이 캐는지 서로 큰 것을 갖겠다고 야단이고, 애들은 사촌끼리 같은 차를 타겠다고 싸우기도 했다. 시아버지도 기분이 좋으신지 일찌감치 대문 밖에 나가 계셨다. 평소에는 조금만 무리하셔도 관절염이 도져 여기저기 파스를 부치시는데 그날은 누구보다 먼저 행장을 꾸리시고 나선 것이다.

쑥은 지천이었다. 무슨 대회라도 벌어진 양 모두들 손놀림이 빨랐다. 집에서 준비해간 김밥을 먹을 때도 시어머니는 너무 재미있어서 밥 생각도 없다고 하셨다. “엄마 이따 제일 많이 캤다고 자랑하려고 그러지?” 하며 시누이가 모셔오곤 했다.

시아버지도 점심값은 해야 한다며 먼저 털고 일어나셨다. 시아버지를 중심으로 남편 시누남편 시동생, 시어머니를 중심으로 나 시누이 동서가 모였다. 모처럼 고부간이 한 편이 되었다. 시어머니는 당신의 어려웠던 시절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삶의 경험에서 얻은 지혜를 일러주기도 했다.
온 가족이 둘러앉아 쑥 다듬기까지 해야 그날 일이 끝났다.

“이 못난이 오빠가 캤지?”

“아니다 그것 내가 캤다” 하며 시어머니는 큰아들 편을 들었다. 시아버지도 오늘 보약 잘 먹었다며 흐뭇해 하셨다.

그 쑥으로 시어머니는 쑥미숫가루를 만드셨다. 좋은 재료를 얻기 위해 장날이면 직접 장을 보셨다. 어머니표 쑥미숫가루가 최고라며 자식들이 잘 먹으니 더 정성을 기울였을 것이다. 그렇게 만든 것을 특별히 나에게 더 많이 주셨다. 언젠가 쑥국을 먹으면서 쑥에 대한 예찬을 했더니 내가 쑥을 좋아한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세월이 흘러 시어머니는 쑥미싯가루를 만들지 못한다. 내가 그때의 시어머니 나이가 되었고 어느새 시어머니란 소리도 듣는다.

며칠 전 애들과 1박2일 여행을 다녀왔다. 말하자면 이것이 쑥캐기 같은 것이다. 첫날은 계룡산 황톳길을 걸었다. 산행을 하며 애들의 직장에서의 애로사항이나 불만 같은 것을 들어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손자 손녀들이 어려 그것들의 시간이 되고 말았다.

저녁에 맥주를 한잔씩 하며 자연스럽게 얘기가 나왔다. 은행에 다니는 며느리는 고객 때문에 힘들 때가 있다고 했다. 돈 맡기고 돈 찾고 세금 내러 은행에 가는데, 왜 고객 때문에 힘이 들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대출 받으러 온 사람들이 자격이 안 돼 대출을 받지 못할 때 가끔은 험한 말을 하기도 하고 떼를 쓰기도 한단다.

중학교 선생인 딸은 학생들이 말을 듣지 않아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했다. 일 년 내내 하는 말이 “죄송해요” 라고 한다. 다른 과목 시간에 딸 반 아이들이 말썽을 피우면 그 선생님한테 담임이 부족해서 그렇다며 죄송하다고 사과를 한단다. 애들끼리 문제를 일으켜 학부형이 학교에 오면 이쪽엄마에게 죄송하다고 하고 저쪽엄마에게 또 죄송하다고 하단다. 죄송해요 만 달고 살다보니 직업에 회의가 느껴질 때가 있다고 했다.

사위도 아들도 어려움을 얘기했고 자정이 넘도록 얘기는 끝날 줄을 몰랐다. 남편이 직장생활 할 때를 회상하며 정말 그만 두고 싶을 때가 두 번 있었다고 했다. 그 때 그만 두었더라면 지금 연금도 못 받을 것이라며 어느 직장이든 그만큼의 어려움은 있다고 달래주었다.

다음날은 딸이 어린 것들을 데리고 있겠다고 해 계룡산 자락인 수통골에 올랐다. 손자, 사위 아들 며느리 남편을 앞세우고 산에 오르는 기분이 꽤 괜찮았다. 오래전 시어머니의 쑥캐러 나서는 기분도 이랬을까. 남편도 그 때의 시아버지 기분 이상이었을 것이다.

네 시간여의 산행으로 직장에서의 애로사항도 생활에서의 불만도 땀으로 다 빠져나간 것 같았다. 주차장까지 10분여를 남겨놓고 소나기가 쏟아졌다. 20여분 동안 지속된 소나기가 미처 빠져나가지 못하고 몸에 남아있던 불만이나 애로사항까지 다 씻어내 주겠다는 뜻인 것 같았다.
나는 시어머니의 쑥미숫가루로 여름을 잘 보냈는데 며느리는 어쩌는지 모르겠다. 계룡산 산행으로 일상에 지친 몸과 마음이 치유되었기를 빌어본다.
더 세월이 흘러 며느리가 내 나이가 되었을 때 한 여름의 가족 산행이 여름을 이기는 힘이었다고 말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