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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조, 재야, 초야

황만길 지역진흥원장

국가정보원의 대선개입 사건은 명백하게 불법적인 후진국형 사건이다. 국가의 안위를 책임져야 할 국가 정보기관이 불법적인 방법으로 정치개입을 하고 국민여론을 왜곡하는가 하면 국민의 참정권을 침해해 민주적 선택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뿐만아니라 국가정보원이 자신들의 불법행위를 감추고 물타기 하려 NLL논란을 키운 것이나, 부당하게 죽음으로 내몰려 고인이 된 노무현 대통령을 부관참시하게 만든 것도 후진적인 행태가 아닐 수 없다. 국가의 시스템을 바꾸고 제대로 된 국가를 만들어 국민을 위한 정치를 펴려 했던 노무현 대통령은 죽어서도 정쟁의 대상이 되고 조롱거리가 된 셈이다.
이런 현실을 목도하며 가끔은 세상에 정의가 있기는 한 것인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결국 정의도 국민의 깨어있는 의식이 존재할 때 가능한 것이다. 국민이 어리석으면 나쁜 정치인, 불의한 언론에 의해 얼마든지 여론은 왜곡되고, 선과 악은 모호해지며 정의와 불의는 구분할 수 없게 된다.
작금의 현실이 그렇다. 국민이 우매하니 나쁜 정치인과 불의한 언론의 여론조작에 속아 넘어가는 것인지, 아니면 나쁜 정치인과 불의한 언론 때문에 국민이 그렇게 우민화 된 것인지 선후를 따져봐야 하겠으나 분명한 것은 오늘날 한국 사회가 정도와 사도를 구분하지 못하는 세상이 되었다는 점이다. 정의와 불의, 거짓과 진실이 구분되지 못하는 세상이 얼마나 비극적인 사회인가? 객관적으로 명백한 진실조차 구분할 수 없는 세상이 됐으니 안타까운 현실이다. 국민의 삶을 좌지우지하는 문제조차 종편에 출연한 토론자에게는 한 편의 웃음거리가 된 현실에서는 진실과 거짓의 경계가 실종된다. 정제되지 않은 불편한 거짓이 난무하다보니 이제 국민들은 어느 것이 진실과 정의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우리 국민들은 국가정보원의 대선개입과 여론조작이 얼마나 무서운 중대범죄이고 역사를 퇴행시킨 국기 문란 사건인지 크게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다. 종편에 나온 진행자와 토론자들이 국민들의 눈, 귀, 입을 가리고 있기 때문이다. 불의와 거짓과 불법이 난무하는 세상이다 보니 본래 세상이 그런 것이고, 그것이 진실인 것처럼 됐다. 드라마와 현실을 구분할 수 없게 됐고, 여야 정치인 중 누가 진실을 말하는지 판단 능력도, 그 일의 중요성도 망각한 듯 하다. 그야말로 혼돈의 세상이 된 셈이다.
자고로 이런 세상이 유사 이래 반복됐다지만 적응이 어려운 것은 나 뿐일까? 역사가 진보와 퇴행을 반복하며 앞으로 전진하는 것이지만 그 퇴행의 과정에서 겪어야 할 고통과 시련은 고스란히 백성의 몫이었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정치, 사회의 부조리는 국민들의 짐이 됐다.
과거 이런 정치, 사회 현실에서 올바른 선비가 택한 길은 조정에 나가 목숨을 걸고 정치를 바로잡으려 하거나, 재야에 남아 나라와 백성의 삶을 염려하며 그 길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항거하는 것이었다. 이도 저도 아니면 초야에 묻혀 자연 속에서 생을 마감하는 일이었다. 그 어떤 선택도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으나 아무래도 재야나 초야보다는 현실 정치의 불의와 모순을 걷어내려 끝까지 소신을 굽히지 않고 정치 현장에 있던 재조 정치인들에게 후한 점수를 주고 싶다. 남들은 어떨지 모르겠으나 내 생각은 그렇다.
스테판 러셀이 분노하라고 했던 것은 정의와 진실이 왜곡될 때 항거함으로써 불의와 거짓에 맞서 싸우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재조와 재야의 의미가 크다고 본다. 그들은 여전히 현장에서 욕을 먹으며 정의와 진실을 위해 싸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깨달음을 얻어 득도의 경지에 이르렀다 해도 초야에 묻혀 사는 지식인이 가장 낮은 평가를 받아야 마땅하다. 나라가 이 지경인데 초야에 있다면 정의와 진실을 향한 생명력만큼은 끝난 것이다. 따라서 이런 국가의 위기와 혼란 앞에서 “나는 정치를 몰라”, “정치와 나는 무관해” 라고 말하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무책임하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초야에 묻혀 살고 있는 나 역시 역사적 소명의식이나 시대 현실에 항거하지 못하는 소시민이거나, 생명력을 잃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국가정보원의 대선개입과 여론조작, 종편 방송의 그 끝없는 가벼움과 편파 보도, 민주당의 거리 투쟁과 시민들의 촛불 집회를 지켜 보며 그저 초야에 묻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