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만길 지역진흥원장

왕과 문무백관의 언행, 정치, 행정을 기록하던 관리를 사관이라 했다. 사관은 역사를 기록하는 사가로서 역사적 사실과 자신이 경험한 내용을 기록했다. 사관 제도는 조선뿐 아니라 고려 때도 있었다. 고구려, 신라, 백제 때도 역사서가 출간된 것으로 볼 때 사관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고려 광종은 역사를 기록, 관리하는 사관이라는 관청을 궁중에 설치한 후 수찬관 등의 관리를 두어 운영하도록 했다. 조선 때는 사초를 기록하는 사관에게 사초의 내용을 문제 삼지 않도록 면책특권까지 주며 사관을 보호했다. 특히 성종 때 완성해 조선사회의 통치이념과 근간이 되었던 경국대전을 함부로 고치거나 열람할 수 없도록 함으로써 역사적 객관성을 담보하려 했다. 사관이 기록한 사초는 설사 임금이라도 수정하거나 시시비비를 가리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역사의 교훈을 주려 했던 것이다.

중국에도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들이 있었다. 황실, 왕실, 제후, 관리 등의 역사를 기록한 위대한 저작물 등은 수많은 사관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중국의 오랜 역사를 상상에서 뿐 아니라 실체로 만날 수 있었던 것 역시 사관들의 기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삼황오제의 고대 역사나 하왕조, 은왕조, 주왕조의 역사가 상상이 아니라 실체였다는 사실은 결국 사마천을 비롯한 사가들과 수많은 무명의 사관들이 기록한 서책 및 갑골문에 의해서였다. 이런 사관들의 기록은 역사가로서의 소명의식, 기록사의 중요성을 인식한 정치 제도, 통치 이념의 확립 목적을 위한 의도 등이 결합된 복합적인 산물이었다.

사관들이 기록한 사초나 기록물 등은 엄격한 보호를 받았지만 때로 폭군이나 사익에 눈먼 권력자들에 의해 훼손, 왜곡되는 사례도 있어 공정성 시비가 일기도 했다. 조선의 국가 지도이념이자 통치체계를 규정한 경국대전은 왕실과 지배집단의 통치를 용이하게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관이 기록한 사초를 임금조차 수정, 열람하지 못하도록 한 것은 올바른 정치의 계승과 함께 잘못된 정치의 반복을 막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다.

국가정보원이 기밀해제를 통해 2007년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전문을 공개해 나라 안이 시끄럽다. 박근혜 정권과 새누리당은 부인하겠지만 국가정보원과 경찰 수장이 저지른 불법적인 선거개입으로 궁지에 몰리자 국면전환, 물타기 용으로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전문을 공개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이다. 불법과 죄악을 덮기 위해 불법적으로 사초를 열람하고 그들의 입맛에 맞게 가공해 언론플레이를 한 행위는 한마디로 국익을 해친 반국가 행위요, 국제적 망신이요, 치욕적인 역사로 기록될 게 자명하다.

보도를 종합해 보면 대통령선거에 승리하기 위해 들여다 볼 수 없는 기밀문서를 국가정보원이 새누리당 의원들에게 제공하고 새누리당 일부의원들이 선거운동에 활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새누리당 선거대책위 총괄본부장이었던 김무성 의원이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에 담긴 노무현대통령의 NLL관련 발언을 입수, 왜곡해 선거에 활용한 흔적이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또한 새누리당 서상기, 정문헌 의원의 발언이나 보도내용을 종합하면 새누리당이 대선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내용을 입수하거나 전해 듣고 대선에 활용하려 했던 정황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만약 이런 정황이나 보도가 사실이라면 국기문란, 반국가, 반민족 행위나 다름없는  짓을 한 셈이다. 정권유지에 눈이 멀어 법을 위반하고 국익을 팽개친 행위가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은 역사의 교훈에서 찾을 수 있다.

폭군으로 알려진 연산군과 기득권인 훈구세력 일파는 무오사화, 갑자사화로 수많은 선비들을 죽이고 씻을 수 없는 과오를 범했다. 조선전기 사림의 거두인 점필재 김종직은 조의제문을 지었다. 조의제문의 내용은 초나라 항우에 의해 억울하게 죽은 의제를, 세조에 의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단종과 비교 풍자함으로써 결국 세조를 비판하는 것이었다. 이 조의제문을 김종직의 제자인 김일손이 성종실록의 사초에 넣었고 사림파 제거에 혈안이 되어 있던 훈구세력은 연산군을 부추겨 사림파를 몰살시켰다. 연산군과 훈구세력의 행위는 사초의 내용을 꺼내들어 통치이념을 훼손한 못된 행위였다.

작금에 박근혜 정권과 새누리당, 국가정보원 등이 저지르고 있는 행위는 죽은 노무현의 통일과 평화 지향 발언이 담긴 사초를 꺼내들어 자신들의 죄악을 덮으려한 파렴치한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사초를 손 대는 것이 잘못됐다며 항의하는 사관과 언관들을 극심한 고문과 처형으로 몰살시킨 연산군과 훈구세력의 교훈은 박근혜 정권과 새누리당에게는 한갓 과거일 뿐인 것 같다. 그러나 그 결과 나라의 힘이 없어 임진왜란, 정유재란, 병자호란을 겪어야 했던 비극적 역사까지 과거의 일로만 치부할 수는 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