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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약국

윤복순 윤약국약사

점심을 먹고 돌아오니 누가 출입문 밑으로 처방전을 밀어 넣고 갔다. K할머니다.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다. 나는 점심시간이 일정하지 않은 편이다. 약속에 따라 조금 일찍 나갈 때도 있다. 돌아올 시간을 적어놓고 갔기에 어지간하면 기다렸을 텐데 내가 나가고 바로 오셨나 보다. 나이 많은 어르신을 두 번 걸음 시켜 죄송하기 그지없다.

할머니는 내 시간을 내며 사는 내가 좋아 보인다고 했다. 전에도 내가 미안해 어쩔 줄 몰라 하니 입맛 있을 때 맛있는 것 많이 먹고 다니라며 괜찮다고 했다. 당신은 시간이 많으니 운동 삼아 한 번 더 오면 된다는 것이다. 어디 이런 마음 내기가 쉽겠는가.

할머니는 겨우 한글을 깨친 정도로 젊은 시절 직장생활을 했다든지 뭐 특별한 일을 한 적은 없다. 남에게 피해주지 않으며 남을 이해하려 노력하며 살았고, 자식들을 반듯하게 키웠고, 당신 나이에 비해 건강한 편이다. 돌아가신 남편의 연금을 받아 사시니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없고, 자식들이 자기 앞가림을 하니 온화하고 편안해 보인다. 곡간에서 인심난다고 남을 배려해 주는 것은 일등이지 싶다.

보름쯤 전이다. 여행을 다녀오느라 5일 동안 약국 문을 닫았다. 내 여행 동안에 병원 예약이 돼 있다기에 문전약국에서 조제 받으라 했는데 내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고 한다.

약을 못 드셔서 어떻게 하냐고 했더니 다른 약은 견딜 만해서 참고 골다공증약은 한 알 꿔 드셨단다. 친구도 일주일에 한 번 먹는 약을 먹는다기에 한 알 얻어 같은 요일에 드셨다고 했다. 당신이 먹던 약하고 다르던데 회사가 달라서 그런 것 아니냐고 물었다. 못 말리는 할머니의 사랑이다.

K아줌마는 약국에서 책 읽고 있는 내 모습을 좋아한다. 자기 친구들까지 데리고 온다. 우리 약국이 동네약국이다 보니 없는 약이 더 많다. 이런 내 형편을 고려해 여유 있게 처방전을 받아 하루 정도 시간을 준다.

동네약국은 약을 뜯어 놓으면 그 약을 처방 받아오는 사람이 없어 불용재고로 남기 일쑤다. 30정이 포장단위인데 대학병원에서는 담당교수가 근무하는 요일에 예약을 받다보니 28일 처방을 받아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내가 단골로 가는 약국은 작은 약국인데 나밖에 이 약 먹는 사람이 없대요. 28개만 사가면 2개가 남아서 그 약국이 손해를 봐 안 되니까 30일 처방해 주세요.” 아줌마가 그렇게 말하니 의사도 웃더란다. 나를 생각해 포장단위로 처방받아오는 K아줌마. 나이는 적지만 배워야 할 점이 많다.

H할아버지는 나를 혼내는 분이다. 내가 이곳에 문을 열고 며칠이 지난 뒤 떡을 해서 동네사람들과 나눠 먹었다. 그는 아직 아파트로 이사를 오지 않아 아파트 위치도 잘 모를 때다. 관리실이 바로 앞이라 관리실에도 떡을 보냈다.

다음날 H할아버지가 약국에 오셨다. 왜 경로당에는 떡을 보내지 않았느냐고 야단을 쳤다. 내가 경로사상이 없는, 막돼먹은, 근본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노인들을 무시했다는 것이었다. 당신이 경로당 회장인데 매우 불쾌하다며 손님이 가길 기다렸다 큰소리로 야단을 쳤다. 기분이 언짢았지만 나도 생각이 짧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리실에 물어 경로당에도 보냈어야 했다.

그 뒤로도 할아버지는 약값이 비싸다는 둥, 왜 그 약은 없냐는 둥, 약국 문을 너무 자주 닫는다는 둥 이런저런 일로 지금까지도 야단을 친다. 우리 약국에 안 오셨으면 좋겠다. 나를 혼내는 재미로 사시는 분 같다. 이렇게 미운정이 14년째 이어진다.

엊그제도 약을 조제해 갔는데 아침약은 30봉 맞는데 저녁약은 24봉으로 6봉 짜리 한 줄이 모자란다고 전화로 야단이셨다. 아침약이 9알 저녁약이 7알이다 보니 혹 한 알이 모자랄 수는 있겠지만 어떻게 한 줄이 틀릴 수 있겠는가. 할아버지는 성질이 급해 당신 말만 막 쏟아내고는 전화를 뚝 끊는다. 나는 그 소리를 다 듣고 있다.

이런 일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처음엔 폭폭 했지만 지금은 나이 때문이라는 것을 안다. 할아버지는 구십을 바라보는 나이다. 금방 놓은 것도 잘 못 찾고 숫자도 못 셀 때가 있다. 아니나 다를까 조금 뒤에 전화가 왔다. 한 줄이 식탁 밑에 떨어져 있더란다. 미안하다며 사과를 했다. 사과한 것도 잊었는지 또 전화를 해 정식으로 사과한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전직 교장선생님이다. 나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좋아한다. 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고, 정보를 알려주고 싶고, 내가 동네사람들 입에 오르내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라는 것도 알았다. 약값이 비싸고 당신이 찾는 약이 없으면 다른 약국으로 가지, 왜 그 약을 구해주기를 원하고 듣기 싫은 소리를 하면서 우리약국으로만 오시겠는가.

할머니가 출입문 밑으로 밀어놓고 간 처방전을 정성을 다해 조제한다. 며칠 동안 문을 닫아도 기다려주고, 낱알이 남지 않게 신경 써주고, 잘못한 것을 혼내주는 이웃사람들의 정이 나를 행복하게 한다. 이것이 동네약국을 하는 재미고 맛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