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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나무

윤복순/윤약국 약사

세 차례 태풍에 나뭇잎이 많이 떨어져서 헤성헤성하다. 남아있는 잎도 뜨거운 물에 데친 것처럼 힘이 없다. 꽃샘추위에 꽃봉오리가 얼어붙은 것 마냥 여간 안타까운 게 아니다.

그나마 감나무는 좀 우선하다. 제일 큰 가지가 옆으로 지긋이 누워있다. 처음엔 찢어지지 않은 것만으로 다행이라 생각 했다. 감이 제법 달려 있다. 감 무게 때문에 자꾸 더 누워지는 것 같아 내 고개도 한쪽으로 기울어진다.

가을엔 감이 되고 싶어요./ 가지 끝에 매달려 그리움 익혀 당신 것으로 바쳐 드리는 / 불을 먹은 감이 되고 싶어요./ 이해인 수녀님의 시를 떠올리며 잎이 모자라 잘 익어갈지 걱정이 된다.

감나무는 수명이 길어 200~250년 산다고 한다. 생명력 때문인지 키우기 쉬워서인지 집집마다 감나무를 키웠던 것 같다. 이런 친근감으로 누구나 감나무에 대한 추억 하나쯤은 가지고 있지 않을까 싶다.

대학에 입학하던 해 가을, 감나무 한 그루를 사다 심었다. 가고 싶었던 대학이 아니어서 한 학기를 방황했다. 그리고 가을, 정신을 가다듬어 늦었지만 대학생이 된 것을 자축하며 감나무를 심었다.

친정집은 마당이 대단히 넓었지만 꽃나무나 과일나무 하나가 없었다. 농사를 많이 지었던지라 꽃밭은 가을 추수할 때 걸리적거릴 뿐이라며, 아버지는 마당에 아무것도 못 심게 했다. 어릴 때 채송화 과꽃 등을 얻어다 담장 밑에 심어 놓으면 다 뽑아 울 밖에 심으라고 야단치셨다.

그러나 내가 감나무를 사 가지고 갔을 때 아버지는 내다 버리라고 하지도 않을 뿐더러 대문 옆에 자리를 잡아주며 심으라고 하셨다. ‘잘 자라라, 나도 학교 잘 다닐게.’ 잘 자랐다. 물론 나도 더 이상 방황하지 않았다. 감나무도 나도 약속을 지켰다. 내가 취직을 하고 감나무도 열매를 맺었다.

어머니는 매일 감을 먹으니 눈이 밝아지는 것 같다고 했다. 그 당시 동생들이 3명이나 대학에 다닐 때라 비타민이니 눈 영양제니 그런 것 생각도 못 할 때다. 어머니는 이미 노안이 시작되었을 때였다.

내가 큰 애를 임신했을 때다. 어머니는 그 해 딴 감 중에서 제일 크고 좋은 것만 골라 한 상자 주셨다. 방 윗목에 쭉 늘어놓고 홍시가 되면 먹었다. 마치 약을 먹듯 정성을 다해 먹었다. 겨울 내내 먹을 수 있었다.

윗목에 있는 감이 참으로 정겨웠다. 내가 심었다는 것과 대학생활을 같이 했다는 것이 마치 식구 같았다. 사회생활과 가정을 잘 꾸리는 것 모두가 감나무가 잘 자라줬기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감 덕분에 임신기간 내내 퍽 안정되고 편안하게 보냈던 것 같다. 친정인 듯 어머니 곁인 듯.

첫 애가 태어났을 때 얼굴에 눈밖에 없었다. 깍쟁이만 하게 큰 눈이 어찌 맑고 곱던지.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그 눈을 바라보고 있으면 온 세상이 다 내 것 같았다. 감을 많이 먹어서 아이의 눈이 그렇게 예뻤다고 믿고 있다.

우리집은 3층이다. 창밖으로 감나무가 보인다. 아파트에 감나무가 있어 집이 한결 따뜻하다. 감나무는 잎이 늦게 난다. 그래서 나를 애태운다. 봄철 다른 나무들은 모두 잎을 피우는데 감나무만 게으름을 피운다.

어떤 이는 감나무는 부끄럼을 많이 탄다고 표현했다. 감꽃을 보면 안단다. 잎도 나기 전에 저 잘났다고 활짝 피어나는 꽃들과 달리 감꽃은 늦은 봄 잎사귀 뒤에 숨어서 수줍게 피기 때문이란다.

새색시 같던 감은 가을이 되면 달라진다. 서리가 내리기 시작하면 하나 둘 잎을 벗어버리고 빨간 알감을 매달고 있다. 그 누드쇼가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하면 어느 누구도 그 유혹에 감전되지 않을 자가 없다.

스페인여행 때 가로수가 오렌지나무인 것을 보았다. 녹색 잎에 주황의 오렌지가 주렁주렁 달린 모습이 어찌 귀물스럽던지. 너도밤처럼 못 먹는 오렌지라고 했다. 우리나라도 감나무를 가로수로 심어, 가을이면 알감이 총총히 달린 감나무길이 쭉 이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사람들의 마음이 한결 풍요로울 텐데.

하늘은 높아지고 감은 익어갔다. 머지않아 감은 맨 서리를 맞으며 고혹한 색으로 아파트 주민들을 유혹할 것이다. 우리 창밖의 감나무도 풍성하진 않지만 휘어진 채로 감에 색을 드리고 있다.

새벽에 운동을 갔다 들어오는데 홍시가 두 개나 떨어져 있다. 태풍에도 살아남은 것들이라 한 개라도 귀하게 느껴진다. 매일 떨어지는 것 같다. 동네 할머니가 감나무에 막걸리를 부어주면 감도 많이 열고 떨어지지 않는다고 귀뜸해 줬다.

살아있는 나무에 함부로 손대지 말아야 한다. 설령 가지가 찢어졌더라도 그대로 두어야한다. 손대는 것이 자연을 훼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눈이 어찌 자연만 하겠느냐고 한다.

나는 지켜보고만 있다. 까치밥 할 몇 개라도 남아야 할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