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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단상

▲ 윤복순 윤약국 약사

남편은 이번에는 꼭 같이 올라가자고 했다. 집에서 출발할 때는 나도 딩굴면서 내려오는 한이 있더라도 오늘은 꼭 해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스키장은 대낮같이 밝았다. 꽤 늦은 시간이었는데 야간스키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몇 년 전인지도 모르겠다. 서울에서 차 지붕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보고 대체 저것이 무엇일까 궁금했던 적이 있다.

지금은 스키가 겨울이면 누구나 한 두 번은 타보는 일반 스포츠가 되었으니 격세지감이란 말이 실감난다.

남편이 전방에 근무할 때였다. 겨울이면 부대 가족들이 모두 나와 스케이트를 탔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스케이트화를 신어 보았다.

스케이트를 타는 것은 고사하고 혼자서 설 수만 있어도 좋았다. 돌 지난 아이가 걸음마를 배우듯 남편 손을 잡고 발 띄는 연습을 했다. 몇 시간 연습 끝에 조금 탈 수 있었지만 타는 시간보다 넘어져 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

발이 너무 아파 조금 쉬려고 하면 이미 스케이트 맛을 안 아이들이 “엄마, 잡아줄게 다시 타 봐요” 하며 나를 가만 두지 않았다. 수없이 넘어지면서도 해가 쏙 빠질 때까지 연습을 계속 했다. 아이들은 제법 코너도 잘 돌았지만 나는 겨우 반듯하게 탈 수 있는 수준이었다.

밤에는 발에서 열이 펄펄 나고 몸을 움직일 때마다 아이구 아이구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 당시 익산에는 스케이트장이 없었다. 온 몸이 아팠지만 남편 덕분에 무슨 특권이라도 누리고 온 것 마냥 기분은 좋았다.

물론 어렸을 때 얼음 타러 많이 다녔다. 우리 집 앞 큰 논이 동네 꼬마들이 겨울 내내 얼음을 타던 곳이었다. 그 때는 수리시설이 없던 터라 겨울이면 논에 물을 가득 가둬 놓았다.

아침밥 먹기가 무섭게 논으로 나갔다. 아버지가 만들어 준 스케이트를 들고. 나는 서서 타는 것은 못 탔다. 앉아서 양 손에 송곳을 잡고 콕콕 찍으며 앞으로 나가는 썰매를 잘 탔다.

한 낮에는 얼음이 녹아 한 발 한발 띨 때마다 아슬아슬했다. 나는 용감무쌍하게 썰매를 타고 다녔다. 그러다 논에 빠진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지만. 우리들은 논두렁에 불을 놓아 양말을 말렸다. 물에 빠진 것을 감쪽같이 숨기려했지만 양말에 불구멍이 나고 말았다. 매일 밤 어머니는 양말을 기워야 했다.

세월이 많이 흘러 TV에서 스키 선수들이 스키 타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나도 한번 타보고 싶었다.

무주에 스키장이 생겼을 때 만사 제쳐두고 갔다. 그날 밤 스키장의 야경을 잊을 수 없다. 처음 보는 것이 최고로 아름다운 것인가 보다. 그 뒤로도 여러 번 갔지만 그날만큼 그렇게 아름답지는 않았다.

아침나절 내내 스키의 기본 동작을 배우고 자신 있게 리프트를 타고 올라 갔다. 그러나 스키를 타고 내려오진 못했다. 마음으론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올라가 보니 경사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팔이라도 부러지는 날이면 약국에 어떻게 나갈까. 주부라면 집에만 있으면 되지만. 초보자코스에서 타는 사람은 모두 초보자라, 내가 넘어지면 비켜가지 못 할 거란 생각이 더 나를 움츠려들게 했다.

마이산 등산을 갔을 때다. 출발할 때는 눈이 오지 않았는데 눈 구덕인 진안은 눈이 쌓여 있을 뿐 아니라 눈이 내린다. 푹푹 빠지며 올라갔지만 산 중턱쯤 부터는 계곡인지 등산로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종주코스를 택한 탓인지 그날 등산객은 우리부부 밖에 없었다.
부득부득 우기며 올라갔지만 결국 정상까지도 못 갔다. 그날 저녁 뉴스에서 보니 진안 지역은 대설주의보가 내리고 휴교령까지 내린다고 했다.

그런 날 정상까지 올라가지 못해 억울해서 며칠 몸살을 알았다. 그런데 스키장에서 리프트를 타고 내려와 밑에서 연습만 하고 놀다 돌아오면서도 억울하기는커녕 탁월한 결정을 내렸다고 쾌재를 불렀다.

언제부턴가 나는 이렇게 뒷전으로 물러앉기 시작 했다. 도전보다는 안전 우선으로. 매번 이번에는 스키를 타고 내려와야겠다고 다짐하며 출발하지만 아직까지 한 번도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초보자코스에는 리프트를 타려는 사람들이 끝이 보이지 않게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나도 서있다 슬그머니 왕초보자들이 연습하는 곳으로 빠져나왔다. 흔들흔들 내려오는 리프트가 나를 겁쟁이라고 놀리는 것만 같았다.

어린 날 논에 빠지면서도 얼음을 탔던, 무릎까지 빠지며 눈 쌓인 마이산을 종주하려 했던, 온 몸에 멍이 들도록 스케이트를 배웠던 나의 도전정신은 다 어디로 갔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