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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마재의 할머니

윤복순 윤약국약사

고구마를 다 쪄 가지고 나왔다. 할머니 생각을 하면 기분이 좋고 내 일처럼 마구 자랑을 하고 싶어진다. 할머니 때문에 이 가을이 풍성하고 부유하고 행복해 입가에 미소가 인다. 질마재에는 미당선생과 국화와 할머니가 있다.

지난 일요일 후배 약사들과 고창에 있는 서정주 선생의 마을에 다녀왔다. 마침 질마재 문화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선생의 ‘국화 옆에서’ 때문인지 온 동네가 국화로 치장되어 있다. 그 노란색이 얼마나 산뜻하든지, 파란 하늘과 어찌나 잘 어울리든지, 나까지 많이 아름다워진 기분이었다.

선생의 묘소에서 바라보니 앞에는 당신의 생가와 문학관이 있고, 어릴 때 살았던 동네가 있고, 살짝 옆으로 바다가 있고, 멀리로 산들이 어깨동무를 한 듯 펼쳐져 있다. 하루 종일 햇빛이 들어 참으로 좋은 음택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편안했다.

평온하고, 아름답고, 순수하고, 친근하고, 여유롭고, 오랜만에 이런 호사를 누렸다. 모든 것이 용서될 것 같은 이곳의 분위기, 그리고 후배들과의 분위기. 고맙고 감사하다.

이런 황홀함에 취해 내려올 때다. 막내 약사의 딸네미가 앞서 뛰어 내려갔다. 애들은 뛰는 것을 좋아한다. 할머니는 무너진 담벼락 사이로 우리들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 우리 쪽을 바라보고 계셨던 모양이다. 애가 “안녕하세요?” 인사를 했다.

할머니 집은 허름했다 손바닥 만 한 마당에 옹색하게 마루가 있고 그곳에서 고구마를 다듬고 계셨다. 식구라고는 백구가 전부다. 그 개도 할머니만큼 나이가 든 것 같았다.

할머니는 어린애(7살)의 인사를 받으니 기분이 좋으셨는지 우리에게 두 팔을 머리에 올려 사랑 마크를 해 보였다. 웃음을 얼굴 가득 머금은 채로. 그 모습이 좋아 우리는 그 집 마당으로 자연스럽게 들어섰다. 아니 “아가 이리와.” 그랬던 듯도 하다.

시골에는 애기 울음소리 그친지가 오래라고 한다. 할머니도 이런 어린애를 오랜만에 보셨을 것이다. 우리가 마당에 들어서자 할머니가 방으로 들어가더니 천 원짜리 두 장을 들고 나와 애기에게 준다. 기분 좋아 하는 할머니의 모습,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얼굴이다. 애기는 받지 않는다고 했다. 보통 가정에서 어른들이 돈 주시면 덥석덥석 받지 말라고 교육시킨 것일 게다.
“왜, 너무 적어서?” 하며 오히려 할머니가 미안해했다. 할머니의 순수하고 따스한 정을 받으라고 해 애기가 받았다. 가을 하늘만큼이나 높고 질마재의 노란 국화만큼이나 상큼하고 신선했다. 어디서 이런 정을 느낄까.

나도 할머니께 정을 드리고 싶었다. 가방은 차안에 있고 몸만 나왔다. 마침 애기 엄마가 지갑을 갖고 나왔고, 얼른 만원 한 장을 공손하게 드렸다. 할머니는 극구 사양하셨다. “이건 아니야.” 받지 않으신다.

“할머니가 우리 애기 귀여워서 용돈 주셨잖아, 나도 우리 엄마 생각나서 드리는 거예요.”
고구마를 검정 비닐봉투에 담아 주신다. 있다고 해도 자꾸 담으신다. 그러더니 그 만원을 봉투 속에 살짝 넣는 게 아닌가. 정말 우리 엄마 같다. 고구마 봉투를 받아들고 돈을 꺼내 할머니 주머니에 넣어 드렸다. 할머니는 눈치 채지 못했다.

할머니가 건강하셨으면 좋겠다. 동네는 조그마한데 이야기 나눌 친구라도 있는지 모르겠다. 고샅은 조용하기만 하다. 얼마나 정이 그립고 말을 나누고 싶으면 쌩퉁 모르는 우리에게 이렇듯 정을 주실까.

작별을 하면서 행여 돈이 빠질까 잘 넣으시라고 했다. 할머니는 또 그 돈을 우리에게 주겠다고 쫓아 나오신다. 그냥 받아 두시고, 대신 고구마를 잘 먹겠다고 했다.

할머니 집에서 나와 조금 밖에 걷지 않았는데 애기가 다리가 아프다며 쉬었다 가자고 한다. 마을 앞 버스 정류장에서 할머니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할머니가 온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걸어 나온다.

“왜요, 할머니?” 할머니 손에 잘 손질된 땅콩 봉지가 들려 있다. 그걸 우리에게 주려고 정신없이 나오신 것이다. 어머니가 자식들에게 뭐라도 하나 더 챙겨주려는 바로 그 마음이다. 아름다운 질마재에 아름다운 할머니가 있어 행복하고 감사하고 감동이다.

세 후배들은 집에 고구마가 있다며 나보고 가져가라고 했다. 우리 집에도 고구마가 있다. 사돈댁에서 보내줬다. 동네 사람들과 나누다 보니 얼마 되진 않지만 가져 오지 않아도 되었다. 그런데도 내가 가지고 왔다. 그걸 쪄 가지고 나와 약국에서 할머니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였다.

J제약회사 직원이 약값을 받으러 왔다. 평소에 활발한데 오늘은 힘이 없어 보였다. 수금 때문에 스트레스 받아서 인 줄 알았다. 4시가 다 되어 가는데 아직 점심도 못 먹었단다. 고구마 먹을 거냐고 물으니 반색을 한다. 월말엔 밥 먹을 시간도 없단다. 물론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이겠지만. 고구마를 먹는 동안 할머니 얘기를 했다. 벌써 몇 번째 인지 모른다.

질마재에는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만큼이나 친숙하고 친근한 구OO 할머니가 계신다. 배가 부르다고 행복해 하는 제약회사 직원 얼굴위에 국화와 할머니의 얼굴이 겹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