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복순 윤약국 약사

어느 날부터 동네 엄마들의 옷이 얇아지더니 봄이 문 앞까지 왔다. 춥다고 미뤄놨던 약국 청소를 해야 될 때가 온 것 같다. 아직은 어설퍼서 마음속으로 만 궁리중이다. 겨울 내내 고양이 세수하듯 겨우 보이는 곳만 쓸고 닦았다.

봄은 모두에게 온다. 공들여 사귄 성이 당신 마음만큼이나 예쁜 시클라멘 화분을 들여놔 줬다. 약국 안이 환하다. 화분 놓을 자리를 만들다보니 전에 놓여있었던 자리의 먼지가 도드라져 보였다. 눈에 가시처럼 그 구석이 자꾸 신경 쓰인다.

내 약국은 동네 약국이다 보니 아파트 사람들의 사랑방 격이다. 과일 사가면서 하나 주고 가기도하고, 간식 시간이라며 떡도 사다 주고, 집에 있는 것들을 가지고 나와 나눠 먹기도 한다. 가끔은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 세상살이 얘기를 나누기도 한다.

일터가 아니라 놀이터로 출근하는 기분이 들 때도 있다. 약국에 오면 나의 팬들이 많다. 그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운다. 그래서 나는 약국을 평생대학이라고 부른다. 그들이 학벌이 대단하고 대단한 일을 해서가 아니라 살면서 직접 경험한 지혜로움으로 생활을 하기 때문이다.

가끔은 쉬고 싶을 때도 있다. 이럴 때도 나의 팬이 오면 반갑게 또 얘기하며 시간을 보낸다. 이런 시간이 짜증스럽지만은 않다. 잃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얻는 것도 있다는 것을 터득했다. 
한 할머니와는 더욱 친하게 지낸다. 그 할머니를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다.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 할머니의 진짜를 알게 되었다.

40여 년 전 할머니가 강경에 살 때였단다. 연무대에서 군인들이 훈련을 마치면 논산으로 기차를 타러 온단다. 여름철 마루에 앉아 있노라면 그들의 군화 소리가 들렸단다. 얼른 일어나 샘에서 시원한 물을 주전자와 물통에 담아 대여섯 곳에 바가지와 같이 쭉 놓아 뒀단다. 더위와 행군에 지친 군인들이 달갑게 물을 먹고 갔다고 했다.

아무나 쉽게 낼 수 없는 할머니의 마음 씀에 감동 먹어 박수를 쳤었다.  이런 할머니랑 친구 하고 싶어 많은 정성을 들였다. 우리의 우정은 십여 년 이어지고 있다.

이제나 저제나 대청소 할 날을 모색하고 있었다. 점심 식사 후 조금 게을러질 시간이었다. 할머니가 뭔가를 들고 오셨다. 수건이다.

“왜?”

“버릴 건 데 약국 청소하고 버리게”

만류할 틈도 없이 빈병 담는 박스 위며 화분 놓여 있었던 구석구석을 반들반들하게 닦아 놓았다.

이렇게 황송할 때가 있나. 젊은 것은 게으름 피우며 놀고 어르신이 청소를 해서 어떻게 하냐며 신문에 날 일이라고 했다.

“내비 둬, 이게 다 복 짓는 일이여.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이런 거잖어.”

내가 한없이 작아짐을 느꼈다. 추울 때 따뜻한 쌍화탕 한 병으로, 입맛 없다고 할 때 밥 한 그릇 사 드린 것으로 생색을 다 냈는데.

어느새 화분 받침까지 깨끗하게 씻어다 놓으셨다.  약국도 화분도 훨씬 돋보인다.

이런 대접을 받아도 될까.  얼굴이 스멀스멀하고 손이 부끄러웠다.

며칠 뒤 할머니가 딸과 같이 약국에 오셨다.  딸이 쇼핑백을 내민다.

“우리 엄마랑 놀아줘서 고마워요.”

“내가 어르신께 사 드려야지, 어떻게 이걸 받아?”

나에게 어울리는 T셔츠다. 내가 할머니한테 많은 것을 배우고 더 잘 놀고 있는데 이래도 될지 모르겠다.

자기 엄마가 열네 살이나 어린 약사랑 놀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했단다.  당신들이 이야기꺼리를 가져오고, 먹을 것을 가져오고, 나는 이야기만 들어 줄 뿐이고 오히려 더 많은 삶의 지혜를 배우는데.

요 며칠 바짝 더 봄 같은 날씨다. 할머니가 사 주신 예쁜 옷을 입고 나왔다. 얼마동안 옷 자랑하기 위해 약국 까운도 입지 말아야 할까보다.

난 어디에 복이 붙었을까. 이런 과분한 사랑을 받아도 될까. 많이 행복하고 그 만큼 조심스런 봄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