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복순 윤약국약사

날씨가 제법 쌀쌀하다. 햇볕이 그리워진다. 북향인 약국 안에서 바라보는 밖은 아직 가을 느낌인데 속절없이 가을이 가고 있다. 가을을 타는지 밖이 어두워지고 찬 기운이 들면 쓸쓸한 기분이 몰려온다.

어느 해 부터인가 가을이면 이랬다. 50대부터였을까. 나도 나이 먹어 가는구나. 인정은 하면서도 이런 기분은 싫다.

가을이 되면 일조량이 감소하면서 우리 몸에서 정상적으로 분비되던 세로토닌이라는 신경전달 물질의 분비가 줄어 기운과 의욕이 떨어진다. 그래서 우수에 젖게 되고 우울증이 오기도 한다. 우울감은 혈중 비타민D 농도가 낮을 때 나타나기도 하는데 햇빛 받는 시간이 적어서 그렇다. V-D가 함유된 음식이나 영양제를 아무리 많이 먹어도 햇볕을 쬐지 않으면 체내에서 활성화가 되지 않는다.

하루 종일 실내에만 있다 보니 나 또한 햇볕 받는 시간이 부족하다. 그래서 일요일이면 무조건 밖으로 나간다. 다행이 오늘 날씨가 좋다. 햇볕 자체를 즐기고 싶어 산에 가려던 계획을 바꿔 금강 둑을 걷기로 했다. 산에서는 나무 그늘 때문에 절반밖에 햇빛을 받을 수 없지만 강둑에선 온몸으로 다 받을 수 있다.

성당포구에서 강경까지 걷기로 했다. 용머리까지 이어지는 억새가 늦가을의 정취를 물씬 풍긴다. 이곳의 억새는 슈퍼억새로 키가 일반 억새보다 2~3배는 크고 대체에너지도 다량 얻을 수 있단다. 신품종으로 어느 대학에서 연구한 것이다. 옥수수나 해바라기같이 식량이 아니어서 식량대란을 초래할 일도 없다고 한다.

억새평원에선 느리게 걸었다. 그 넓이가 한없다. 아름다운 경관을 보며 여유롭게 걷다보니 안정과 위로와 편안을 얻었다. 햇볕을 온 등과 어깨로 받으니 밝아지고 긍정적인 기분이 상승하여 우울감이 사라졌다.

억새에서 진한 가을 냄새가 난다. 햇볕에서 느껴지는 가을은 목욕물에 몸을 담갔을 때처럼 시원하고 따뜻했다. 이런 상쾌함으로 걸으니 걸을수록 기분이 좋아지고 끝도 없이 걸을 수 있을 것 같다.

자전거 동호인들이 몇몇이서 그룹을 이뤄 지나간다. 그들의 어깨에도 햇볕이 내려앉는다. 내 등에도 똑같이 쏟아지고 있다고 생각하니 참 든든하다. 모든 것에 공평하게 가을 햇볕이 내린다.

강둑 밖으론 드문드문 농가가 있고 올망졸망한 밭농사가 있다. 허청에 무청을 쭉 걸어놓았다. 그 모습이 귀물스럽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해 바라기를 하면서 무청을 다듬고 있다. 그들의 모습이 늦가을의 자연과 잘 어울리고 평화롭다. 이렇게 사람도 자연의 일부가 된다.

며칠 전 교무님과 점심식사를 하러 갔다. 농장을 겸하고 있는 식당인데 주인아주머니가 무와 무청을 주었다. 나도 어머니가 하셨던 것처럼 짚으로 엮어 메달아 두고 바라보고 싶었지만 짚을 구할 수 없어 옷걸이에 걸어 빨래건조대에 걸어 놓았다. 그 모습도 보기 좋다.

나도 모르게 아주머니들에게로 발길이 옮겨졌다. 무청시래기는 다 똑같은 줄 알았는데 단무지무청이 원조란다. 일반무청보다 연하고 부드러우며 비타민과 식이섬유가 더 많이 들어있단다. 무청은 그늘에서 말려야 한다니 집에 돌아가면 빨리 뒷베란다로 옮겨놔야겠다.

강변엔 역사와 문화가 있다. 이 구간엔 나바위성당이 있다. 이 성당은 한옥의 지붕과 용마루 한쪽에 고딕식 벽돌을 붙여 종탑을 세워 조화롭게 균형을 맞췄다. 서구식 성당 건축양식과 우리나라 건축양식을 절충시킨 우리나라 초기 성당의 건물로 문화재다. 유럽의 큰 성당들 보다 훨씬 정겹고 아름답다.

이 성당은 한국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신부가 중국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페레올 주교 다불뤼 신부와 금강하구인 황산 나루터인 이곳에 상륙한 것을 기념하여 만들었단다. 지은 지 100년이 넘는 성당으로 기와지붕이다. 바깥의 마루는 없애고 회랑을 만들었는데 서까래가 다 보인다. 성당 안에는 중앙에 기둥을 두어 칸막이를 하여 남녀석의 구별을 두었다.

나바위성당 이란 이름은 이 성당이 화산이란 조그만 동산에 있는데 이 산의 끝나는 지점에 넓은 바위가 있다. 이 바위의 이름이 나바위라 붙여진 이름이다.

성당 뒤편으론 망금정과 십자가의 길이 있다. 이 길을 걷는다. 듬성듬성 남은 나뭇잎 사이로 보이는 파란 하늘이 멋지다. 붉게 물든 단풍나무 이파리가 꽃처럼 아름답다. 은행나무의 노란잎은 눈이 부실만큼 아우성이다. 길바닥은 황금물결이다. 왕성했던 여름이 가고 편안한 가을 햇살이 가득하다.

햇볕은 정서활동에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하루 종일 햇볕 속을 걸으니 그 자체만으로도 평온하고 행복하다. 그리고 부자가 된 기분이다.

겨울이 다가온다. 호르몬이니 비타민이니 정서 영향이니 등을 떠나 나는 햇빛 그 자체가 좋다. 단풍도 억새도 가을 분위기도 햇빛이 있어서 좋은 것이다. 한 번쯤은 아무생각 없이 햇볕을 느껴보자. 가을 탄다는 말이 쑥 들어갈 것이다.

공기는 차가워지고 일조량은 자꾸 줄어든다. 동절기 온 몸으로 햇볕을 받으며 걸을만한 곳으로 강둑만한 곳이 있을까. 군산하구둑에서 대청댐까지 금강은 정비가 잘 되어 있다. 다음엔 강경에서 공주까지 걸어봐야겠다. 햇볕치유 제대로 받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