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복순 윤약국약사

지난 일요일, 겨울날씨답지 않게 햇볕이 쨍 났다. 금강변을 걸을까. 강둑길은 햇볕만 좋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바람이 없어야 한다. 조그만 바람도 강바람이 될 때는 살 속까지 파고드는 시베리아바람이 되기 때문이다. 버스 타는 곳까지 걸으면서 바람의 간을 보았다.

화창하고 따뜻한 날을 기대하며 강경행 버스에 올랐다. 황산대교에 내렸을 때는 따뜻한 햇살이 어깨를 감싸줬다. 바람까지 없어 오늘 계를 탔다며 호탕하게 출발했다.

포구에는 강경젓갈축제를 하는 곳인지 큰 광장이 있다. 모두 눈 천지다. 벤치도 일부 햇볕 받은 쪽만 조금 녹아 있다. 아저씨 한 분이 휴대용가스에 불을 피워 벤치 위의 눈을 녹이고는 마른걸레질을 하고 있다. 당신 혼자 앉을 자리를 만드는 것이 아닌 것 같다. 언제부터 했는지 벤치 두 개가 말끔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눈이 내리고 그 눈의 양이 많아 눈 없는 날이 없을 정도다. 모처럼 따뜻한 그 날, 사람들이 강변으로 산책 나올 것을 감안해 이렇게 벤치를 정리하는 것 같다. 이런 위대한 강경시민 때문에 오늘 여행이 아주 좋을 거란 예감이 들었다.

강경에서 부여까지의 금강은 어느 구간보다 아름다웠다. 웅포에서도 성당포구에서도 보지 못했던 물오리가 떼로 있다. 11시 조금 전부터 걷기 시작해 오후4시가 넘어서 부여대교에 도착하였다. 그 동안 내내 햇볕이 났고 바람 한 점 없었다. 겨울 날씨가 이렇게 하루 종일 좋기는 쉽지 않다. 모두가 그 아저씨 덕분인 것 같다.

부여에서 강경 가는 버스를 어디서 타는지 몰라 무작정 터미널로 갔다. 서너 번 물어서 터미널에 도착했고, 매표소에서 강경행 차표를 살 때였다. 강경 가는 버스는 없단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다.

“강경은 어떻게 가요?” 일단 논산으로 가서 강경으로 가란다.
이미 해가 기울었고 날씨도 쌀쌀해졌다. 택시를 타야하나? 버스표 사려고 줄을 섰을 때 내 뒤에 서있었던 아주머니가 강경은 시내버스를 타고 가면 된다고 알려준다. 이곳은 시외버스 터미널이다. 조금만 올라가면 정류장이 있단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

시내버스정류장에 거의 다 갔을 때 버스 한 대가 금방 출발할 기세로 서 있다. 6시간 가까이 걸어서 많이 지쳐있었지만 있는 힘을 다해 뛰었다. 마음이 바빠서 행선지도 보지 않고 얼른 기사에게 큰 소리로 강경 가냐고 물었다. 허름한 내 옷 때문이었을까 말없이 고개만 흔든다.
버스시간표에서 보니 1시간 이상 기다려야 했다. 날씨가 좋아 ‘계 탔다’고 큰소리 빵빵 쳤는데 집에 가는 길이 쉽지 않아 기가 꺾였다.

정류장에서 노상에 좌판을 벌여놓고 귤이며 과일을 파는 할머니가 강경만 가면 되냐고 물었다. 강경만 가면 익산가는 시내버스는 많다.

길 건너 밑으로 조금만 내려가면 약국이 있고 그 앞이 정류장이란다. 그 곳에선 강경 가는 차가 자주 있단다. 이곳에서는 석성면을 거쳐 가는 거고 그 곳에서는 세도면으로 해서 간다고 알려준다. 90도 각도로 인사를 하고 길을 건넜다.

또 시내버스 한 대가 부릉부릉 곧 출발할 기세다. 마구 뛰어가
“강경가요?” 하고 물었다. 나보다 조금 더 나이가 들었을까 한 아저씨가
“아주머니, 나도 강경 가니까 나 타는 차만 타면 되요.” 하며 나를 안심시키려는 모습이 역력했다. 아마 내가 한글을 모른다고 생각한 것 같다. 시계를 보더니 올 시간이 다 되었다며, 오면 알려줄 터이니 걱정하지마라고 한다. 세상은 이렇게 약자를 챙겨준다.

버스 한 대가 또 왔다. 잘 보이지 않아 고개를 삐쭉 내밀고 행선지를 확인하려는데 “강경 가는 것이 아니네요. 내가 꼭 알려드릴게요.” 한다. 곧바로 강경행 버스가 왔다. “아주머니 어서 와서 타세요.”하며 나를 앞세운다. 그 아저씨가 하라는 대로 했다.

시내버스는 중간 중간에 타는 사람이 없으니 직행같이 달렸다. 기사가 임천에서는 시간을 맞춰야 한다며 15분을 기다린다고 양해를 구했다. 이 틈을 이용해 나도 기사에게 부탁을 했다. ‘제가 익산을 가는데 익산가는 버스를 어디서 타는지 몰라요. 강경가면 익산 버스 타는 곳에서 좀 내려주세요.’ 

기사아저씨가 내리라는 곳에서 내리니 익산행 버스가 내가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대기하고 있다.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추운 데서 많이 기다리지 않고 집까지 잘 왔다.

세상이 각박하고, 무관심하고, 없는 사람이 살기가 더 팍팍해진다고 말들이 많지만 아직은 세상에 인정이 있다. 나만 못한 사람을 도와주려는 보통시민들이 많다. 내가 묻기도 전에 그들이 먼저 도와주었다.

나보다 가진 것도 많은 것 같고, 아는 것도 많은 것 같고, 훨씬 잘나 보이는 사람에게, 그들보다 나은 것이 없는 사람이 먼저 도와주겠다고 선뜻 손을 내밀기는 어려울지도 모른다.

배울 준비가 된 사람에게만 스승이 나타난다고 한다. 모르는 곳에 가면 도로 표지판이나 행선지를 보기 전에 사람을 찾고 얼굴을 맞대고 도움을 청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친절하고 내가 원했던 것 이상을 알려주기도 한다.

다음 일요일에도 나는 유행이 지난 옷차림으로, 화장기 없는 얼굴로 대중교통을 이용한 여행을 갈 것이다. 좌판을 벌려놓고 과일을 팔던 할머니에게 모자를 벗어 드리지 않고 온 것이 못내 아쉽다. 배낭 속에 직접 만든 털모자 하나 넣어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