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숲교회 담임목사

강 남 웅

“무기는 돈을 주면 살 수 있지만 정신은 불가능하다”라는 말이 있다. 이는 현대전이 아무리 병기가 발달되고 과학화된 총력전이라 하더라도 전쟁의 수행 주체는 역시 인간이며 그 의지력이 승패의 절대적 요소임을 의미하는 말이다. 예컨대 작은 나라 이스라엘이 덩치 큰 아랍연합국을 격파한 것이나 베트남이 미군과 맞서 이길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유대민족을 뭉치게 한 신앙과 선민의식, ‘호치민’의 리더십으로 뭉쳐진 민족의식 때문이었다.

과거의 잘못된 역사를 인정하지 않고 왜곡하려는 일본 아베 정권의 화이트 리스트 제외 조치로 야기된 한·일간의 경제전쟁으로, 국민들의 분노가 폭발해 단순한 일제 불매운동을 넘어서 일본 안 가고, 안 먹고, 안 사기 운동으로 전 방위 확산되고 있다. 그런데 과거와 비교해서 한국인의 시민의식이 좀 더 성숙해진 것 같다.

한국인 상당수가 아베 정부(일본 극우 집단)와 평범한 일본인을 구분해야 한다고 스스럼없이 말하는 것이나, 서울 중구청이 내건 반일 현수막을 시민들이 앞장서서 철회시킨 것 등, 적극적 반일·극일의 움직임 못지않게 이런 현상을 경계하고 성찰하려는 건강한 자기비판의 움직임도 함께 감지되고 있는 것이다. SNS문화가 일상화되면서 실시간으로 토론과 논쟁에 참여하면서 사회적으로 넘어야 할 선과 그렇지 않아야 할 경계에 대한 의식이 향상되고 있다고 보여 진다.

또 하나 생각할 점이 있다. 알려진 바와 같이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과 한국 군인들이 베트남에서 엄청난 살상과 인간으로서 상상할 수 없는 만행이 있었다고 한다. 훗날 미국과 베트남이 수교할 때, 미국이 이 문제로 사과할 의향을 밝히자 베트남 정부에서 거부하며 “우리가 승전국인데 왜 사과를 받는가?”라고 말했다고 한다.

사실여부를 떠나 이 일화에 매우 중요한 교훈이 담겨 있다. 그것은 이겨 본 사람만이 건강한 자아상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베트남이 어찌 보면 철전지 원수 같은 미국이나 한국과 수교를 맺고 적극적인 경제 교역을 하는 것을 두고 베트남의 실용주의를 칭찬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들의 정신세계 깊은 곳에는 ‘이겨 본’ 자존감이 자리하고 있고 그 자존감이 베트남 국민들로 하여금 과거의 상처를 딛고 적대국들과의 친선우호 관계를 만드는 원천이 된 것이 아닐까?

조금씩 우리사회의 의식이 성숙해지고 진일보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비슷한 원리가 아닌가 싶다. 즉 우리나라가 과거와 비교해서 국제적 위상도 높아지고 있고, 경제적으로나 사회적, 특히 문화적으로 크게 성장했기에 그에 비례하여 우리 국민들의 마음 한 켠에 ‘성숙함’이 자리할 수 있는 심리적 ‘여유 공간’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역으로, 우리가 특히 일본하고만 어떤 갈등이 발생하면 바짝 ‘독기’가 오르는 이유도 어찌 보면 일본과의 싸움에서는 ‘이겨 본’ 경험이, 일부 스포츠를 제외하고 거의 없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역사적으로 일본에게 받은 상처와 고통이 너무 크고 깊기에 일본이 우리를 괴롭히거나 얕잡아 본다고 생각이 되면 우리 안에 내재한 온갖 트라우마가 다 소환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우리가 일본과 건강한 관계를 맺으려면, 우리도 일본을 이겨 본 경험들이 자꾸 쌓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역사적으로 일본에 대한 우월자였던 사실을 알지 못하는 이유는 아마도 일제강점기 35년 동안 “조선의 청소년들에게 조상의 무위·무능·악행을 들추어내 과장해 알려 주어서 그들의 부조(父祖)를 멸시하게 하고 허무감에 빠지도록 한 연후에 일본 사상을 주입하라”는 일본의 교육시책 때문으로 보아야 하겠지만, 또 다른 이유는 광복이후 오늘날까지 역사를 바로 세우려는 의지가 부족했던 역사학계의 책임도 간과할 수 없는 문제일 것이다.

현재 벌어지는 노 재팬 운동은 하나의 좋은 시금석이 되리라고 본다. 우리가 극단적인 반일의 모습으로 스스로 경박해지거나 천박해지지 않으면서, 또한 일방적으로 고개를 굽실거리며 소심해지거나 비굴해지지 않으면서, 우리 안에 내재한 자존감을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일본에게 더 이상 지지 않는 경험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이런 경험들이 향후 일본과의 더 건강한 관계 정립에도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금년 광복절 기념식에서 대통령은 지정학적으로 4대 강국에 둘러싸인 우리나라의 과거 100년이 열강들의 침탈, 일제강점, 전쟁과 분단, 냉전으로 이어지는 국제질서의 틀 안에서 끊임없이 타자로부터 강요받아온 역사였다면, 새 100년은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 남북이 주도적으로 새롭게 한반도 질서를 만들어가야 한다며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외치며 기념사를 마무리 했다.

천년이 넘게 갈등하던 독일과 프랑스가 EU안에서 갈등을 풀고 협력하는 것처럼 정치와 외교가 협력할 방도를 찾아내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가 하나되어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작은 일부터 일본에 승리하는 경험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