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들을 수용하면서 보다 탄탄하고 유용한 도로를 만들어왔다. 새 도로와 확장된 도로는 또 도시의 형태를 바꾸는 동인(動因)이 된다. 우리는 그 탄탄대로 위를 자동차에 의탁해 보다 빠르게 달리며 갈수록 넘쳐나는 자동차들을 스치며 각종 신호들을 만나게 된다. 달릴 때나 설 때나 이완의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도로 위에서, 소통신문은 길을 물었다.
우리가 두 발로 손수 걸을 수 있는 길들은 어디로 갔는가. 누구랄 것이 없이 비켜서야 할 만큼 좁은, 그래서 눈인사를 절로 주고받게 되는 길은 어디로 밀려났는가. 늦은 밤 돌뿌리나 괴한이 걱정돼 가족을 마중나온 사람들이 서성이는 골목은 어디에서 잊혀져가는가. 스마트폰 없이도 바람과 풀벌레 소리, 집집에서 흘러나오는 웃음소리와 온갖 삶의 냄새를 찾아나서기로 했다.
우리의 기억들은 작은 길에서 큰 길로 빠르게 빠져나갔지만, 앙금이 된 기억은 어느 길 위에도 남아 있기 마련이리라. 잊어선 안 될 기억들을 만난다면 오늘 소통신문의 막연한 외출이 가치를 얻게 되는 것이리라. 길은 길 나름의 기억을 지니고 현재와 내일로 연결되며, 길은 곧 사람이니 길과 사람을 길 위에서 만난다는 것 자체가 오늘을 사는 우리의 힐링이 아닐까.
'익산의 길을 따라 소통하다'는 그런 질문들의 출발점이다.
<편집자주>
큰 남바위 오르는 길
"동정을 여기다 바친 남자애들이 많아" 집창촌이었던 옛 철인동(창인동)을 벗어나 익산대로 북쪽으로 이동하면서 김영규 회장은 청춘 시절을 회상한다.
"교통여건상 이쪽이 남학생들 주요 통학로였는데, 모자를 채가는 거야 여자들이"
흥미로운 얘기에 고개를 돌리자 김 회장의 눈빛이 빛난다.
"남학생들 뒤로 몰래 다가가서, 그걸 가지고 줄행랑을 쳐. 반사적으로 쫓아가게 되어있지. 여자가 어디로 가겠어. 몸 파는 집으로 쏙 들어가 버리는 거지. 어쩔 수 없잖아. 모자를 찾을라면"
김 회장 얼굴에 청춘 시절에 지었을 법한 장난기 많은 웃음기가 언뜻 번졌다.
"일을 치르고 나도 모자를 안 내줘. 다음날 화대를 가지고 가야 모자를 내줬지. 모자를 뺏기려고 이쪽으로 일부러 들어오는 애들도 있었다니까"
하하하. 우리는 한바탕 웃었다.
남중 이화아파트 쪽
그 사이에 남중 이화아파트 건너편에 도착했다.
김 회장이 "이화아파트가 익산에서 가장 처음 지어진 가장 높은 건물이었어"라고 한다.
딱 한 동의 건물이 대로변에 쓸쓸하게 서 있어서 무심하게 지나다녔던 곳인데, 익산에서 가장 오래된 고층건물 치고는 짱짱하다는 생각이 든다.
익산대로가 개설되기 이전에는 모현동에서 동쪽으로 철길을 넘으면 남바위로 오르는 완만한 경사길을 만날 수 있었는데 그 초입에 큰 느티나무가 서 있고 길은 나무를 중심에 놓고 비켜가듯 나 있다.
언덕 너머에 교보생명 빌딩이 보인다.
청춘은 그곳에서도 피었다
남바위 동네 어귀에 있는 근린공원
남바위 고개길(익산대로 36길)
김 회장은 그 뒤쪽에 "남성고등학교와 남성중학교, 이리여자중학교가 모여 있었다"며 눈길로 그 지점들을 어림잡아 본다.
이 언덕길(익산대로 36길)을 넘으면 이리고등학교 사거리가 나오고 한 블록 더 가면 시청 앞 사거리가 나온다.
언덕 초입, 또는 남바위 동네 어귀에는 폭은 좁지만 길게 한 블록을 꽉 채운 작은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폐가들을 밀어낸 터와 기존 공터를 합쳐 조성된 이 공원에는 동네 사랑방 모정을 비롯해 간단한 체련시설·놀이시설이 설치되어 있고 묘목을 벗어난 지 4년쯤 되었을 법한 벚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심은 시기 탓인지 벚꽃은 절반쯤 피어 풋풋한 분위기로 오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끈다. 몇 년쯤 지나면 이 벚꽃 숲이 제철을 만나면 이 주택가의 명물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 김 회장이 "여기도 다 밭두렁 길이었어" 한다.
일순 주택들이 들어서기 이전의 푸릇한 언덕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밭두렁 길은 산지사방으로 가는 사람들을 수용했을 테니, 남바위 주택가 안에도 정상 쪽으로 혹은 능선을 따라 난 골목길이 거미줄처럼 얽혀있으리라. 혹은 새로 난 직선도로 때문에 용도가 폐기되어 끊겼거나 유휴지 상태가 된 밭두렁 길도 무연고 묘처럼 주택가 안에 남아있을 것이다.
우리가 잠시 머문 소공원 사거리(익산대로 36길과 선화로 29길이 교차)는 남바위 산의 5부 능선쯤 된다. 남중 이화아파트를 등지고 서니 이 사거리가 남바위 구릉지대에서 가장 깊다. 시청 앞 사거리 쪽으로 조금은 가파른 오름이거니와 오른쪽(이리여고 변 선화로 직전까지)과 왼쪽(익산지방국토관리청 직전까지)도 완만한 오름이다.
선화로 29길 곁골목과 이어지는 익산대로 34길
우리는 이리여고 쪽으로 36보쯤 걸어가 동진 떡방앗간과 익산 독서실 사이의 밭두렁 길 중 하나였을 선화로 29길 곁 골목을 통해 동쪽 오름을 올랐다. 과거 서울 가는 버스가 다니던 길이 익산시내에는 네 갈래가 있었는데, 그중 서쪽 도로가 남바위 정상부를 지나 갔다는 김 회장의 안내에 따른 것이다.
선화로 29길 곁 골목
오름 골목을 오르기 전에 뒤를 돌아보니 큰길(선화로 29길)이 나기 전에 이어져 있었을 골목(익산대로 34길)이 서쪽으로 흘러내려 익산대로에 스며들고 있다. 김 회장은 "익산대로가 나기 전에는 모현동 쪽 사람들이 철길을 넘어 이 골목을 타고 통학도 하고 시장도 다녔어" 한다.
골목은 추억을 품었다
남중 경로당
이리여고 쪽 완만한 오름
골목 초입에서 40보가량 오르다 모두가 평등이 깃든 집을 뜻하는 '무등정사'라는 현판이 걸린 남중 경로당을 지나게 된다. 우리는 75보가량을 올라 오래된 길 '선화로 31길'을 만난다.
영정통에서 이리여고를 거쳐 거성아파트를 지나온 길(후기성교회에서 남쪽으로)
이 길은 과거 영정통에서 시작해 지금의 이리여고를 거친 뒤 지금의 선화로를 가로질러(그때는 선화로가 없었다) 지금의 거성아파트 옆을 거친 뒤 우리가 당도한 후기성교회 앞을 지나갔다.
지금은 주택들이 너도나도 침범해 실제 노폭이 7m도 채 안 되는 이 길을 버스가 다녔을까. 의아했다. 우리들의 답사 여정이 과거 익산 시내를 가르며 서울로 가는 네 갈래 길의 합류 지점이 된 까닭이었다.
'선화로 31길' 곁 골목
우리는 선화로 31길의 북쪽으로 가지 않고 빠져나온 골목에서 곧장 선화로 31길을 가로질러 후기성교회 옆 쪽(동쪽)으로 이어져 흘러내리는 곁 골목을 선택했다.
탱자나무 울타리 집
이 길은 과거 서쪽 철길 서쪽에 살던 사람들이 다녔던 길이다. 70여보 쯤 내려가던 김 회장이 "여긴 아직 그대로 남아있네" 한다. 오른쪽으로 40여 년 전에도 있었던 탱자나무집이 손바닥만 한 텃밭을 끼고 힘겹게 서 있다.
30여보 더 내려가자 대전 사거리를 지나온 또 다른 서울 가는 길로 빠지게 된다. 구 동이리역에서 시작된 이 길은 과거에는 곧게 뻗은 가장 큰 신작로였는데, 후일 북진하면서 새로 개설된 큰길을 만날 때마다 이름이 바뀐다. '목천로 1길이었다가 평동로를 넘으면서 '평동로 7길'이 되었다가 중앙로를 넘으면서 '중앙로 5길'이 되었다가 선화로를 넘으면서 '선화로 33길'이 된 것이다.
남일 이용원과 광일사 인쇄소
우리가 막 들어선 '선화로 33길' 건너편에는 상가들이 형성되어 있고, 그 남쪽 일원에는 남성맨션이 자리 잡고 있다. 주변에는 인쇄소와 광고사들이 집단화되어 있다. 건너편의 광일사 인쇄소와 나란히 붙은 남일 이용원 건물이 정겹다.
이리고등학교 정문
서울 가는 길들의 합류지점으로 가기 위해 북쪽 오름을 걸었다. 이리고등학교 사거리(선화로 33길이 익산대로 36길과 교차하는 곳) 남서쪽 도로변에 있는, 이 일대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의 '동양 사진관'은 폐업한 지 꽤 된 듯 소슬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5거리를 형성한 남바위 정상 북동쪽
남바위 정상 남서쪽
남일이용원께에서 남바위 정상까지는 약 250보가량 되었다. 정상은 5거리를 형성하고 있다. 동서를 가르면서 북진한 네 갈래 길은 이곳에서 합류해 외길 국도 1호선이 되었다. 국도 1호선은 국토관리청 옆 이리공고 정문 앞을 지나 시내를 빠져나간 뒤 함열 쪽으로 달린다.
글 공인배·사진 송승욱 기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