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들을 수용하면서 보다 탄탄하고 유용한 도로를 만들어왔다. 새 도로와 확장된 도로는 또 도시의 형태를 바꾸는 동인(動因)이 된다. 우리는 그 탄탄대로 위를 자동차에 의탁해 보다 빠르게 달리며 갈수록 넘쳐나는 자동차들을 스치며 각종 신호들을 만나게 된다. 달릴 때나 설 때나 이완의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도로 위에서, 소통신문은 길을 물었다.
우리가 두 발로 손수 걸을 수 있는 길들은 어디로 갔는가. 누구랄 것이 없이 비켜서야 할 만큼 좁은, 그래서 눈인사를 절로 주고받게 되는 길은 어디로 밀려났는가. 늦은 밤 돌뿌리나 괴한이 걱정돼 가족을 마중나온 사람들이 서성이는 골목은 어디에서 잊혀져가는가. 스마트폰 없이도 바람과 풀벌레 소리, 집집에서 흘러나오는 웃음소리와 온갖 삶의 냄새를 찾아나서기로 했다.
우리의 기억들은 작은 길에서 큰 길로 빠르게 빠져나갔지만, 앙금이 된 기억은 어느 길 위에도 남아 있기 마련이리라. 잊어선 안 될 기억들을 만난다면 오늘 소통신문의 막연한 외출이 가치를 얻게 되는 것이리라. 길은 길 나름의 기억을 지니고 현재와 내일로 연결되며, 길은 곧 사람이니 길과 사람을 길 위에서 만난다는 것 자체가 오늘을 사는 우리의 힐링이 아닐까.
'익산의 길을 따라 소통하다'는 그런 질문들의 출발점이다.
<편집자주>
이리공고 정문 앞으로 지나는 길
동서를 가르며 시내를 빠져나온 네 가닥 서울 가는 길(국도 1호선)이 만나는 남바위 정상은 오거리를 이룬다.
우리는 남서쪽을 등지고 북동쪽을 바라보며 섰다.
사월의 봄, 오후 햇살은 따사로웠으나 서늘한 바람이 이마를 식힌다.
남쪽에서 경사진 길을 걸어 올라올 때 몸이 데워졌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된다.
이 일대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다 생각하니 보이는 게 또 하나 있다.
남쪽 2킬로미터 안쪽 남중동 일대에 산재한 학교들이다.
큰길들이 놓이기 이전에는 그 안에 이리여고를 비롯해 이리여중, 남성여고, 남성중학교, 이리동중, 이리고, 이리공고 등이 들어있었다는 사실이다.
김영규 회장은 이리공고 정문 앞으로 지나가는 오래된 길(선화로 31길) 쪽 우측에 서있는 5층 건물(루카스 엔 에스)을 가리키며 "저 건물 옆으로 길이 있어. 쭉 내려가면 황새골에 갈 수 있었지. 황새골 옆에 이리농림학교(전북대 익산캠퍼스)가 있고" 한다.
그렇다. 과거 전국의 명문 중 하나인 이리농림학교도 연접해 있었다.
네 가닥 길이 달려와서 이곳에서 합류한 곡절 중 하나가 아닐까.
이리시가 교육도시의 명성을 드날릴 때 수많은 사람들이 학교를 향해 길을 내었다.
사람들이 몰리는 곳에서 길은 합류했다
서쪽에서 철길을 넘어 동쪽으로, 전라북도 각지에서 충청도 이남에서 익산역으로 온 수많은 학생들도 함께 그 길을 밟았다.
남중동을 향해 동서로 뚫린 수많은 길, 구불구불한 골목들이 그것을 증언한다.
우리는 남바위에 오를 때 그 길 중 하나를 타고 왔듯이 철길 쪽으로 내려갈 때도 그런 오래된 길을 따라가기로 했다.
우리는 돌아서서 남서쪽으로 뻗은 '선화로 31길'(이리여고 후문 옆을 지난 뒤 영정통이 되는 길)을 10여보 가량 걷다가 남쪽으로 가지를 친 '선화로 29길' 곁 골목 쪽으로 빠졌다.
남바위에서 철길 쪽으로 내러 가는 '선화로 29길'
이 길은 남바위 서쪽면에서 아래로 내려가 철길을 건넜던 길이다.
남바위 일대는 이리역 폭발사고 이전부터 농지(밭) 위에 주택가가 형성되었고, 70년대 후반부터는 급격한 개발 붐이 일어 좁은 면적 안에 빼곡하게 가옥들이 들어찬 곳이다.
하지만 이곳 역시 택지개발에 따라 동산동을 비롯한 영등동으로 인구와 상권이 옮겨가면서 빈집들이 많이 생겨났다.
또한 폐가를 철거한 주택가 한복판은 밭으로 개간되기도 했다.
'선화로 29길' 곁 골목 변에 있는 공가
폐가를 철거하고 개간한 주택가 한복판의 밭
'선화로 29길'(이리여고와 익산지방국토관리청을 연결)로 나온 우리는 남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익산대로 36길' 변의 최초 출발지점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다.
비교적 곧게 뻗은 길을 걸으면서 김영규 회장이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더니 "큰 길이 나면서 길이 많이 끊겼어. 이렇게 산 옆구리를 깎아내 남북으로 길을 내면, 본래 있던 남북으로 능선을 타고 난 길을 단절시키는 거야" 한다.
그 말에 살펴보니, 남바위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길이 선화로 29길에 차단되면서 매끄럽게 이어가지 못한다.
"산 옆구리에 길을 내다보면 아래쪽은 낮으니까 성토를 해서 높이고, 위쪽은 높으니까 도로 표고에 맞게 산을 깎아내기 마련이지. 산 위쪽으로는 축대들이 생기는 거야. 그렇게 끊어진 길들이 익산에만 해도 많이 있다니까"
그렇게 말해놓고도 불편한 심기가 가시지 않았는지 김 회장은 길에 대한 개념을 확인한다.
"새로 놓는 길들은 반듯해야 해. 그 밑으로 상수도 하수도가 지나가야 하니까. 길이 구불구불하면 그걸 묻기도 사납고, 내구성도 떨어지고 그런 거지. 발전이란 것이 그런 거야. 반듯해야 돼"
'익산대로 36길'(남중 이화아파트 사거리-시청 앞 사거리) 초입으로 나온 우리는 서쪽으로 길을 건넜다.
철길을 넘으려면 남중 이화아파트 옆으로 곧게 뚫린 넓은 길(익산대로 9길)로 들어가면 됐는데, 김 회장이 "저 쪽에서 들어가는 길이 있을 거야" 하면서 남쪽으로 방향을 튼다.
110여보 가량 걸었다. 거기에 길이 있었다. 익산대로 변에 있는데도 눈에 잘 띄지 않는 길이다. 더구나 길 옆에는 '해피하우스 요양병원'이 있다. 남중 이화아파트와 모현대교 중간 지점쯤이다.
'익산대로 5길'(익산대로와 철길 사이의 마을 안길) 중간지점에서 바라본 서북쪽
'익산대로 5길'(익산대로와 철길 사이의 마을 안길) 중간지점에서 바라본 익산대로 쪽
'익산대로 5길'(익산대로와 철길 사이의 마을 안길)에서 바라본 남중 이화아파트
길 이름은 '익산대로 5길'인데, 남중동의 철도변에 길게 형성되어 있는 작은 마을 안길 구실을 하고 있다.
'익산대로 9길'로 나가는 곁 골목
'익산대로 5길'(익산대로와 철길 사이의 마을 안길) 변에 있는 흑벽돌집
철길 육교에 설치된 엘리베이터
철길 육교 옆에 설치되어 있는 엘리베이터
철길 육교 아래에 설치되어 있는 엘리베이터
서북쪽으로 뻗은 이 길을 따라 25보 가량 되는 곳에 남쪽으로 뻗은 곁 골목이 있다.
이 골목 역시 익산대로와 철길 사이의 마을 안길이리라. '익산대로 5길'은 서북쪽으로 100여보 되는 지점에서 익산대로 9길과 교차하고, 다시 40여보를 곧장 나아가다가 왼쪽으로 꺾어 오래된 흑벽돌집을 지나쳐 20여보 가량 걸어가면 북쪽 20여보 앞에 있는 육교를 마주할 수 있다.
육교 위에서 익산역 쪽으로 바라본 철길
육교 위에서 배산쪽을 바라본 철길
육교 아래로 가까이 다가가던 우리들 입에선 약속이나 한 듯 탄성이 터져 나왔다.
지상에서 육교 위까지 이질적으로 붙어서 있는 유리박스는 주변 텃밭에서 날린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고, 그 안에 있는 것은 분명 엘리베이터였다.
누구를 위한 엘리베이터일까. "연로한 노인들 때문일까" "주변에 몇 명이나 돼서?" "교통약자들을 위한 걸까" "아무튼 철길 이쪽 남중동과 저쪽 모현동 사람들 목소리가 큰가 보다" "센 사람들이 사는가 보다" 너도 나도 한 마디씩 보태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육교 위에 올라 내려다보니 지나가는 기차 위에 서 있게 된다.
지나가는 기차들을 바라보며 망중한을 즐길 수 있겠다.
육교 위에서 내려다본 모현동 철길 변 가옥들
육교 위에서 내려본 철길
마침 날씨도 좋아 육교 위는 서늘한 바람 속에서 주변을 조망하기 딱 좋은 전망대가 되어준다.
철길 변의 가옥들은 세월을 잊었다. 가옥들이 오롯이 품고 있는 시간은 공간을 나누지 않는다. 모현동이든 남중동이든 다르지 않다.
육교 위에서 내려다본 남중동 철길 변 가옥들
북쪽을 바라보던 우리는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있는 육교와 거기에 설치되어 있는 육교를 발견했다.
모현동 쪽 철길 변을 둘러보다 보면 여기에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이유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글 공인배·사진 송승욱 기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