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들을 수용하면서 보다 탄탄하고 유용한 도로를 만들어왔다. 새 도로와 확장된 도로는 또 도시의 형태를 바꾸는 동인(動因)이 된다. 우리는 그 탄탄대로 위를 자동차에 의탁해 보다 빠르게 달리며 갈수록 넘쳐나는 자동차들을 스치며 각종 신호들을 만나게 된다. 달릴 때나 설 때나 이완의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도로 위에서, 소통신문은 길을 물었다.

우리가 두 발로 손수 걸을 수 있는 길들은 어디로 갔는가. 누구랄 것이 없이 비켜서야 할 만큼 좁은, 그래서 눈인사를 절로 주고받게 되는 길은 어디로 밀려났는가. 늦은 밤 돌뿌리나 괴한이 걱정돼 가족을 마중나온 사람들이 서성이는 골목은 어디에서 잊혀져가는가. 스마트폰 없이도 바람과 풀벌레 소리, 집집에서 흘러나오는 웃음소리와 온갖 삶의 냄새를 찾아나서기로 했다.

우리의 기억들은 작은 길에서 큰 길로 빠르게 빠져나갔지만, 앙금이 된 기억은 어느 길 위에도 남아 있기 마련이리라. 잊어선 안 될 기억들을 만난다면 오늘 소통신문의 막연한 외출이 가치를 얻게 되는 것이리라. 길은 길 나름의 기억을 지니고 현재와 내일로 연결되며, 길은 곧 사람이니 길과 사람을 길 위에서 만난다는 것 자체가 오늘을 사는 우리의 힐링이 아닐까.

'익산의 길을 따라 소통하다'는 그런 질문들의 출발점이다.

<편집자주>

과거 연탄공장이 있었던 부지(철도와 연접, 김삼용 김이룡이 설립 운영)

마을과 철길 사이의 방음벽

남중동과 모현동은 철길이 갈라놓았다. 그 이전에는 한 고을이었다.

옥야현 현청이 있던 곳이어서 오늘날 익산에서는 역사가 가장 오래된 곳이다.

가장 먼저 도시가 형성되었던 이곳을 철도가 두 동강 낸 것이다.

모현동은 이리읍 고현리과 익산군 북일면 모인리가 1961년 합병되면서 개칭된 이름이다.

합병되기 이전의 고현리는 지금의 고현교회와 고현초등학교 일원이었는데, 이곳이 옛 옥야현 소재지였기에 현내(縣內)마을이라고도 불렸다.

이 현내마을과 남중동의 남바위는 본래 한 고을 공동체였던 것이다.

철길을 건너는 사람들은 학생들 혹은 시내나 시장엘 가는 사람들뿐만 아니었다.

이웃사촌과 정을 나누려는 사람들도 많았다. 일상적인 철도 무단횡단은 안전불감증을 불렀다.

노인들이 열차에 부딪히거나 깔려 사망하는 사고가 빈발했던 이유다.

1990년 두 개의 육교가 놓였다. 하나는 '남중 이화아파트'에서 '명일 모현아파트' 남쪽의 '새 동네 미곡상회' 앞길을 연결하고, 또 하나는 '명일 모현아파트' 북쪽에서 남중동 선향교회와 '모현 우남아파트'를 연결한다.

우리가 서 있는 곳은 남쪽에 있는 육교 위다.

김영규 회장은 남쪽의 모현대교 옆에 있는 '꿈동산 어린이집'을 가리키며 "저기가 김삼룡 일가가 운영했던 연탄공장 자리야"라고 한다.

모현대교가 익산의 동서축인 선화로의 부속시설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 연탄공장 터는 모현대교 북쪽 일원이다.

어린이집을 제외하면 꽤 너른 공터가 철도와 연접해 있다.

화물기차에서 직접 석탄을 받고 화물기차에 바로 제조된 연탄을 실을 수 있는 조건이다.

물류비의 최소화는 막대한 이익으로 돌아왔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호시절도 철도운영의 안전지수가 낮았을 때의 일이다.

안전시설과 안전에 관한 시스템이 강화되면서 철도는 최소한의 접근성만을 허용하게 되었다.

익산의 내로라하던 연탄공장이 사라진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철도역의 통제로 갑자기 늘어난 물류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만은 확실하다.

발전이 부른 단절

기찻길 옆 '명일 모현아파트'

철길 변에서 모현대교와 고현초등학교를 연결하는 선화로 23길에 닿는 선화로 27길

우리는 과거의 느낌으로 철도를 넘나들어보기로 한다.

모현동 쪽으로 내려가는데, '새 동네 미곡상회'라는 낡은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육교에서 막 내려서자 김 회장의 일관된 푸념이 마을과 철길을 가로막은 방음벽에 반사된다.

"저 봐. 이쪽과 저쪽이 가로막혔잖아. 발전은 반드시 공과가 있어. 발전이 행복을 주는 것만이 아니야" 발전이 고통을 수반한다는 김 회장의 말은 박정희의 경부고속도로 건설 일화에까지 번졌다.

권력은 초대형 사업도 식은 죽 먹듯이 결정했고, 고속도로 건설현장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지만 기록에 남지 않은 사람도 많다는 얘기였다.

너절한 단독주택가에서 바라본 북쪽의 '명일 모현아파트'가 우뚝 서 있다. 낯설지만은 않다.

묘하게도 신구의 조화를 이룬다. 우리가 걷는 길은 '선화로 27길'이다. 이편한세상 아파트(모현대교 서쪽)와 배산을 연결하는 '선화로 23길'에 닿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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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화로 27길에서 남동쪽으로 빠져 기찻길 옆에 닿는 곁 골목

선화로 27길과 선화로 23길이 만나는 곳에서 바라본 남쪽(모현대교 쪽)

우리는 100여보를 걸어 서쪽으로 쭉 나가서 '선화로 23길'로 들어가지 않고, 북쪽으로 꺾어 24보 가량을 나아간다.

왼쪽(서쪽)으로 난 직선도로는 '선화로 23길'에 합류한다. 하지만 이 길은 동쪽(오른쪽)으로 계속 나아가지 못하고 30여보 가량 되는 곳에서 길을 똑바로 마주 본 가옥에 가로막혀있다.

철길 육교 쪽으로 가려면 우리가 왔던 길을 역으로 따라가야 한다.

선화로 27길과 선화로 17길이 교차하는 곳에서 바라본 서쪽

모현동 이화아파트 옆으로 난 북측 육교 엘리베이터 쪽으로 나가는 길

우리는 23길에 들어가 교차하는 서쪽 '선화로 17길'을 바라본다. 모현동 신시가지에 닿는 길이다.

남쪽은 모현대교와 이편한세상 아파트를 경유해 익산역 서부광장으로 가는 길이다.

우리는 배산 방향인 북쪽을 선택해 걸었다. 북측 철길 육교로 가기 위해서였다.

철길에서 한 블록 떨어진 곳이지만 나름 번화한 길이다. 조밀하지만 규모 있게 형성된 상가들이 자아내는 분위기도 그렇지만 오가는 행인들이 생기를 뿜어내는 듯했다.

우리는 고현초등학교 앞에서 배산으로 나가는 길을 바라보다가 '모현 이화아파트' 앞으로 돌아와 '명일 모현아파트' 쪽으로 난 샛길을 따라 북측 육교의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육교를 건너 남중동 쪽 엘리베이터를 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서 좁은 외길을 따라 걷는데, 10여보 앞에 초등학생 셋과 학부모가 걸어가고 있다.

고현초등학교 정문과 배산 가는 길

남중동에서 고현초등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이다. 그러고 보니 남바위 일대에는 초등학교가 없다.

그제야 철길 엘리베이터의 주요 용도를 알게 된다.

길 왼편에는 텃밭이 있고, 밭과 길을 구분하는 울타리는 요즘 보기 드문 무궁화나무다.

우리는 학생들이 모현 현대아파트 쪽으로 사라진 뒤에도 한동안 그 길 위에서 서성였다.

한적한 그 길이 주는 포근하고 정겨운 느낌 때문이었을 것이다.

모현 우남아파트 앞길은 '익산대로 15길'이다.

우남아파트 서쪽 담장 옆에 세워져 있는 오래된 덤프트럭이 부식을 방지하는 오일을 뒤집어쓰고 전시된 것처럼 행인의 시선을 끈다.

북측 철길 육교에서 바라본 남중동 우남아파트

북측 철길 육교에서 바라본 배산

우리는 그 유명한 모현 우남아파트 정문 앞에 선다.

실패한 행정의 결정판

북측 육교와 연결된 남중동 길

북측 육교와 연결된 익산대로 15길 결길(우측(동쪽)으로 모현 우남아파트, 북쪽으로 남중동 현대아파트 가는 길

익산대로 15길 옆의 모현 우남아파트

이 아파트는 신축된 지 1년도 채 안 되어 심각한 결함들이 발견됐다.

각층의 바닥이 어린아이가 굴러도 물침대처럼 출렁거렸다.

골목길 옆 마당에 핀 꽃들

구조안전진단을 해보니 건물의 주요 보와 각종 부재가 빠져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층간소음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벽에 심한 균열이 났다. 주민들은 시공사에 보수보강과 손해를 배상하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법원은 주민들의 손을 들어줬다. 시공사는 빠진 보를 보강하고 주민들에게 금원의 손해배상을 이행했다.

그러나 몇 년 뒤 이 아파트 주민들은 건물이 기울어지고 있다며 시공사에 전면적인 아파트 재건축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주민들과 시공사간 송사가 장기화되면서 주민들이 두파로 갈라졌다.

재건축파와 보수보강파였다. 재건축파는 위기를 조장했고, 보수보강파는 잘 보수하면 큰 문제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익산대로 15길에서 남중 이화아파트 쪽으로 내려가는 골목

그런 와중에 익산시가 모현 우남아파트에 대한 구조안전진단을 시행했다.

그 결과 이 아파트는 재난 안전등급 D 판정을 받았다.

이는 붕괴 우려가 있는 등급이다. 그리고 또 10여년 가까운 시간이 흘러갔다. 민선6기 시장으로 익산시에 입성한 박경철이 아파트 재건축파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사후대책을 마련하지 않은 채 긴급대피명령을 내렸다.

오래된 가옥

남중 이화아파트 옆 익산대로 5길에서 바라본 남측 철길 육교

재건축파들이 아파트를 비우고 이주했다. 익산시는 이주비용을 지원했다.

박경철은 법정에서 부정선거가 인정되어 당선무효형을 선고받고 익산시를 떠났다.

하지만 아파트 주민 절반은 그대로 살고 있다. 3년 동안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

이주한 주민들이 문제다. 익산시장의 명령에 따랐을 뿐인 그들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행정기관이 사인간 분쟁에 뛰어들어 재정을 낭비하고 책임을 지지도 못하는 전무후무한 사례다.

그 기막힌 현장이 이 일대에서 가장 높은 곳에 실존한다는 사실이 또 아이러니하다.

우리는 우남아파트 옆 남쪽으로 흘러드는 내리막길로 빠졌다.

처음 출발지였던 남중 이화아파트로 가기 위해서였다. 골목 입구에 담장이 없는 주택이 있다.

정원에 피어난 여러 봄꽃들을 동네 사람들과 함께 감상하려는 집주인의 마음이 보인다.

반듯하게 가로지른 큰길을 남쪽으로 가르고 내려가는 동안 이 일대에서 가장 높았던 소나무 밭을 지나고 오래된 고가도 지난다. 조금은 과거를 기억하고 있는 동네다.

글 공인배·사진 송승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