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들을 수용하면서 보다 탄탄하고 유용한 도로를 만들어왔다. 새 도로와 확장된 도로는 또 도시의 형태를 바꾸는 동인(動因)이 된다. 우리는 그 탄탄대로 위를 자동차에 의탁해 보다 빠르게 달리며 갈수록 넘쳐나는 자동차들을 스치며 각종 신호들을 만나게 된다. 달릴 때나 설 때나 이완의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도로 위에서, 소통신문은 길을 물었다.

우리가 두 발로 손수 걸을 수 있는 길들은 어디로 갔는가. 누구랄 것이 없이 비켜서야 할 만큼 좁은, 그래서 눈인사를 절로 주고받게 되는 길은 어디로 밀려났는가. 늦은 밤 돌뿌리나 괴한이 걱정돼 가족을 마중나온 사람들이 서성이는 골목은 어디에서 잊혀져가는가. 스마트폰 없이도 바람과 풀벌레 소리, 집집에서 흘러나오는 웃음소리와 온갖 삶의 냄새를 찾아나서기로 했다.

우리의 기억들은 작은 길에서 큰 길로 빠르게 빠져나갔지만, 앙금이 된 기억은 어느 길 위에도 남아 있기 마련이리라. 잊어선 안 될 기억들을 만난다면 오늘 소통신문의 막연한 외출이 가치를 얻게 되는 것이리라. 길은 길 나름의 기억을 지니고 현재와 내일로 연결되며, 길은 곧 사람이니 길과 사람을 길 위에서 만난다는 것 자체가 오늘을 사는 우리의 힐링이 아닐까.

'익산의 길을 따라 소통하다'는 그런 질문들의 출발점이다.

<편집자주>

황새골 골목길

선화로 곁 골목에서 시작된 '황새골 길'은 낡은 주택 숲을 구불구불 남하하다가 '인북로 28길'을 만나면서 자취를 감춘다.

하지만 도로가 아직 나지 않았던 시절의 눈으로 보면 황새골 길은 끊기지 않고 계속 남쪽으로 이어지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완만한 오르막길을 형성하는 골목은 '인북로 28길'과 '중앙로 13길'을 연결하는 언덕길이다.

밀집된 가옥들이 만든 좁은 길이다. '인북로 28길'에서 '하누리건축' 건물 옆으로 연결되는 황새골 길은 '중앙로 23길'이다.

30여보쯤 가면 삼거리 골목을 만나게 된다. 우리는 서쪽을 택한다. 다시 30여보께에서 인북로 28길로 빠지는 오른쪽 길을 지나쳐 오름길을 탄다.

구불구불한 이 길은 180보 가량의 골목인데, 정상에서 전북대학교 익산캠퍼스(구 이리농림학교) 후문을 건너다 볼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올라온 길은 사실 과거에는 길이 아니라 골짜기였다고 전해진다. 물론 건물들이 산을 덮기 전의 얘기다.

골짜기는 북서쪽으로 흘러 지금의 전신전화국 주변에 있던 논들의 젖줄이었다. 특히 이 골짜기의 물은 일년 내내 마르지 않았다.

물고기가 많았고 황새들의 서식지였던 이유다.

이는 우리가 황새들이 노닐던 옛길에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물에 가까운 인간들은 골짜기 주변에 집을 이었다. 우후죽순처럼 집들은 온 산을 메웠고, 사람들이 모여들자 골짜기는 길이 되었다.

저 아래 '인북로 28길'과 상가 건물들도 골짜기를 덮어버렸다.

익산, 그 도심 속의 유일했던 친수공간은 물을 가까이 하려던 사람들에 의해 지하에 묻혀버렸고, 그 역설을 황새골 길은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물(친수공간)이 귀한 익산에서 황새골길은 물을 매장해버린 난개발의 자화상이 아닐 수 없다.

구 이리농림학교(전북대학교 익산캠퍼스) 정문(지금은 후문)앞의 '중앙로 13길'은 주변에 소나무 군락을 거느리고 북쪽 전북기계공고(구 전북대 공대)에 이르고, 이 길은 다시 서쪽으로 나아가 철길을 건너 모현동의 현내마을에 이르렀다.

우리는 오늘 과거 소나무 숲 푸른띠를 따라 구 이리농림학교와 이어진 국민생활관 뒤에서 여정을 시작했다.

옛길은 큰길 선화로가 개설되면서 끊긴 듯 하지만, 그것을 감안하면 도심을 남북으로 가로지른 산의 능선을 따라 편안하게 사람들의 발길을 받았던 옛길의 흔적은 지금도 뚜렷하다.

가옥들 아래 매몰된 도심 유일의 친수공간

도심속 공원이 된 국민생활관 주차장 정원

국민생활관은 정부가 88올림픽을 준비하면서 익산시에 준 양여금으로 지어졌다.

국민생활관 뒷길(선화로 14길)도 그때 난 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선화로 때문에 멀게 느껴지지만 선화로가 놓이기 전까지 이곳은 이리농림학교 권역이었다.

국민생활관은 여러 체육시설을 시민들에게 제공하면서 구도심 시민들의 생활 속에 스며들었다.

무엇보다 31년 된 국민생활관의 주차장에 딸린 정원 숲은 도심 속의 작은 공원으로서 주민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다.

국민생활관 뒷길(선화로 43길)과 익산시청 제2청사를 연결하는 '인북로 38길'

'인북로 38길'변에 있는 제2청사 주차장

우리는 도로보다 높은 곳에 조성되어 있는 돌계단 위쪽 주차장 정원을 올려다보며 국민생활관과 함께 생긴 '선화로 43길'에서 동쪽으로 뚫린 '인북로 38'로 접어들었다.

70보가량 주택가를 가른 이 길은 사거리를 이룬다.

'선화로 45길'이 남북으로 주택가를 관통하면서 '선화로 43길'을 교차하고 있다.

사거리와 연접한 북쪽에 익산시 제2청사 주차장이 있고, 100보가량 되는 '인북로 38길' 끝에 익산시청 제2청사가 있다.

구 익산시장 관사

언덕 택지에 조성된 주택가

제2청사 동측으로는 옛길 '인북로 32길'이 지나가는데 그 길 건너편에 전북기계공업고등학교(구 전북대 공대)가 보인다.

김영규 회장은 제2청사 쪽으로 걸어가면서 "전에는 여기서 저 쪽 전북대 공대까지 소나무 숲이었어"하더니, 전북기계공업고등학교 쪽을 가리킨 손끝을 움직여 허공을 서쪽으로 긋다가 남쪽으로 꺾어 선을 그은 다음 전북대학교 익산캠퍼스 쪽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저 길이 이리농림학교와 전북대 공대를 잇는 옛길이었지. 그때는 길이 저렇게 넓지 않았으니까 소나무 숲이 저쪽에서 이쪽으로 죽 형성되어 있었어. 지금 기계공고 울타리 쪽에 서있는 일본 소나무 니끼다 말고 홍송 숲이 말이야"

하지만 우리는 전북기계공고 쪽으로 계속 걸어가지 못했다. 김 회장이 '인북로 38길'의 오른편에 있는 건물 앞에서 "이 건물이 익산시장 관사였어"라고 했기 때문이다.

'별나라 어린이집'이라는 간판을 단 이 건물은 시장의 관사였다기 보다는 웬만한 관공서 건물이 아니었을까 할 정도로 육중하다.

건축 양식도 익산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독보성을 구현하고 있다. 넓은 터와 후정의 수십년 된 나무들도 눈길을 끈다.

"이게 익산시청을 중앙동에서 여기 남중동으로 옮겨오면서 지은 것이데, 관선시대 시장들이 사용했었는데, 민선시장으로 선출된 조한용 익산시장이 이 관사에 들어오지 않고 자신의 집에서 출퇴근하면서 비게 된 거지"

익산시청의 남중동 시대는 1970년부터니까 지방자치가 실시되기 이전까지 꽤 많은 관선시장들이 이 관사를 거쳐간 셈이다.

'인북로 40길' 주택가

이 익산시청 관사의 동측에는 '인북로 40길'이 남북으로 주택가를 관통한다.

이 길은 이리농림학교(전북대 익산캠퍼스)와 전북공대(전북기계공고)를 잇는 옛길(선화로 47길)과 '인북로 38길'을 연결한다.

망각의 덧칠들

'선화로 47'에서 바라본 전북대 방향

'선화로 47길'에서 바라본 전북기계공고 방향

우리는 '인북로 40길'의 남쪽 끝에 있는 '선화로 47길'로 가서 옛길을 밟아보기로 한다.

'인북로 40길'은 완만한 경사를 이룬다. 경사길을 막 오르려는데 김 회장이 오른쪽 첫 번째 건물 앞으로 다가선다.

구 이리시장 관사 뒤에 있는 이 건물은 입구부터 가정집과 다른 면모를 보인다.

박운섭 아카데미(고 조석인 씨의 저택) 전면과 뒷마당 정원

건물 꼭대기에 걸려있는 '박운섭 아카데미'라는 간판이 눈길을 끄는데, 김영규 화백이 이 집의 주인과 통화를 시도한다.

집 주인은 지금 없으나 대문이 열려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대문은 이 건물의 동쪽 끝에 있다. 김 회장은 대문 쪽으로 이동하면서 "사실 이 집은 얼마 전까지 한국 복싱계의 큰 별이신 조석인 씨 소유였어"라고 운을 뗀다.

"그 양반이 직접 지으셨지. 이 집 지하에는 표준 링이 설치된 복싱체육관이 있었어. 그런데 익산의 거목이 얼마 전에 돌아가신 거야" 김 회장의 말을 들으면서 우리는 깜짝 놀랄 만큼 정원이 잘 조성되어 있는 저택이 마당에 들어섰다.

"그런데 그분 아들이 아버지가 돌아가시자마자 이 건물을 경매에 내놓은 걸 익산의 한 화가가 매입한 거야" 우리는 한동안 마당을 서성거렸다.

화려한 정원도 대한복싱연맹 경기 부회장으로 마지막 불꽃을 태운 조석인 선생도 무상한 시간의 찰나에 기탁할 뿐인가 하여서다.

이 마을은 1970년대 말부터 익산시가 조성한 택지에 말마디깨나 하는 사람들이 집을 지으면서 형성됐다.

김 회장의 말이다. 우리는 이 주택의 잘 닦인 길을 200여보 가량 걸어 '선화로 47길'로 들어왔다. 서남쪽에는 전북대 익산캠퍼스가 있고, 동북쪽에는 전북기계공고가 있다.

전북기계공고 앞을 지나는 '인북로 38길'

전북기계공고 정문

우리는 '선화로 47길'을 동북쪽으로 걸어 '인북로 32길'을 만나 왼쪽으로 꺾어 전북기계공고 앞을 지나 왼쪽의 '인북로 38길'로 되돌아간다. 뒤돌아보니 '선화로 47길'은 익산시청 앞쪽으로 유유히 흘러간다.

글 공인배·사진 송승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