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들을 수용하면서 보다 탄탄하고 유용한 도로를 만들어왔다. 새 도로와 확장된 도로는 또 도시의 형태를 바꾸는 동인(動因)이 된다. 우리는 그 탄탄대로 위를 자동차에 의탁해 보다 빠르게 달리며 갈수록 넘쳐나는 자동차들을 스치며 각종 신호들을 만나게 된다. 달릴 때나 설 때나 이완의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도로 위에서, 소통신문은 길을 물었다.
우리가 두 발로 손수 걸을 수 있는 길들은 어디로 갔는가. 누구랄 것이 없이 비켜서야 할 만큼 좁은, 그래서 눈인사를 절로 주고받게 되는 길은 어디로 밀려났는가. 늦은 밤 돌뿌리나 괴한이 걱정돼 가족을 마중나온 사람들이 서성이는 골목은 어디에서 잊혀져가는가. 스마트폰 없이도 바람과 풀벌레 소리, 집집에서 흘러나오는 웃음소리와 온갖 삶의 냄새를 찾아나서기로 했다.
우리의 기억들은 작은 길에서 큰 길로 빠르게 빠져나갔지만, 앙금이 된 기억은 어느 길 위에도 남아 있기 마련이리라. 잊어선 안 될 기억들을 만난다면 오늘 소통신문의 막연한 외출이 가치를 얻게 되는 것이리라. 길은 길 나름의 기억을 지니고 현재와 내일로 연결되며, 길은 곧 사람이니 길과 사람을 길 위에서 만난다는 것 자체가 오늘을 사는 우리의 힐링이 아닐까.
'익산의 길을 따라 소통하다'는 그런 질문들의 출발점이다.
<편집자주>
옛 이리농림학교(현 전북대 익산캠퍼스)에서 전북공대(현 전북기계공고)를 연결하는 '선화로 47길'은 남쪽 선화로와 북쪽 동서로를 잇는 오래된 길이다.
남쪽 끝 선화로의 '전북대 오거리'를 건너 계속 남하하면 전북대학교 익산캠퍼스 서쪽 경계 전체를 품은 '중앙로 13길'과 연결된다.
이 '중앙로 13길'은 구 마동치안센터에서 동쪽으로 꺾여 완만한 경사길을 내려가서 중앙로에 합류하며 사거리를 이룬다.
중앙로의 오른쪽 가까운 곳에는 익산역, 왼쪽 가까운 곳에는 동산동이 있고, 앞으로 곧장 가면 주현로로 들어가에 된다.
그런데 '중앙로 13길'이 옛길을 계속 유지하려면 마동치안센터 사거리 남쪽으로 연결되는 '중앙로 9길'로 곧장 들어가야 한다.
이 길은 끝에서 결국 중앙로를 만난다. 하지만 옛길은 '중앙로 11길'과 교차하는 작은 사거리를 계속 남쪽으로 건너 '인북로 18'길과 만나는 사거리에서 오른쪽(서쪽)으로 꺾인다.
거기에서 130보 가량 걸어가 인북로를 넘으면 옛 동척관사길을 만나고, 계속 나아가 옛 영정통 거리를 관통하면 익산대로를 건너 익산역에 당도하게 된다.
말하자면 이 길은 학교가 귀하던 시절의 통학길이다. 일제 강점기부터 터가 닦여 80년대 말까지 익산을 '교육도시'로 이끌었던 길이다.
'선화로 47길'의 북쪽 끝에서 동서로를 건너면 소라산이다. 소라산의 북쪽과 북서쪽에는 남성고와 남성여고, 남성중과 남성여중이 있다.
또 '선화로 47길'에서 전북기계공고 정문 앞을 지나는 '인북로 32길'을 타고 내려가다가 익산시청 사거리의 인북로를 건너면 '익산대로 36길'로 들어가게 되는데, 서쪽으로 향하는 이 길을 190보 가량 따라가면 오른쪽에 이리고등학교가 있다.
시청앞 사거리에서 20여보 가량의 인북로 남쪽변에는 남성맨션과 교보생명 빌딩이 있는데, 과거에는 이 일원에 남성고와 남성여고, 남성중과 남성여중이 있었다.
또 이리고등학교 정문앞 길인 익산대로 36길이 서쪽에서 만나는 '선화로 33길'의 남쪽 끝의 대로 '선화로' 남쪽 변에는 이리여고가 있다.
학교를 품다
이렇듯 '선화로 47길'은 고등교육기관들을 품었던 본류다. 오늘 우리의 여정은 익산역에서 시작되어서 북진하던 옛길의 끝 부분이다.
우리는 남중우체국 뒤쪽의 공영주차장에 도착했다. 김영규 회장은 용도가 폐기된 듯 주변에서 밀려난 좁은 길로 들어가서 저 아래 인북로 건너편의 동쪽 길을 가리킨다.
"여기로 연결되는 저 길이 도시가 개발되기 전에 있었던 유일한 길이야" 여기는 500보 가량 동쪽으로 가서 '선화로 47길'을 만나는 '인북로 54길'이다.
이 길은 동쪽 끝에서 전북기계공고 동쪽 울타리를 끼고 주택가를 관통해 '익산대로 52길'을 교차한 뒤 인북로에 합류한다.
인북로를 교차해 동쪽 주택가로 들어가다가 끊긴 '익산대로 52길'
'익산대로 52길'은 익산대로에서 동쪽으로 가지를 쳐 뻗어 온 길이다.
이 길 안에는 고용노동부 익산고용센터와 익산세무서, 익산지방국토관리청, 남중지구대, 북부시장 등이 들어있다.
인북로를 관통한 이 길은 50보 가량 경사길을 올라와 110여보 가량 더 동쪽으로 나아가다가 끊겼다.
'익산대로 52길'은 여기서 동쪽으로 이어진 '인북로 54길'을 꽤 넓은 폭으로 지웠는데, 여기서 길을 건너 '인북로 54길'을 계속 따라가지 않고 동북쪽으로 곧게 난 경사길을 내려가면 오른쪽에남중동 주민자치센터가 있다.
'인북로 54길'에 있는 전북기계공고 교직원 사택
'인북로 54길에서 남쪽으로 가지를 친 골목(옛 전북농대 후문 쪽)
여기(인북로 54길)는 높은지대다.
김 회장이 가리키는 '저 길'로 가기 위해서는 50보 가량의 급경사를 내려가 인북로를 건너야 한다.
경사가 끝나면서 평지를 이루는 '선화로 33길'의 정상부
오른쪽은 새로 난 길. 왼쪽은 100년이 넘은 옛 황토길
'저 길'(선화로 33길)도 여기만큼 높은 지대를 올라간다. 100여보 가량 올라가야 평지에 가까운 길을 만날 수 있다.
김 회장이 우리에게 보여주려고 하는 길은 야산과 야산으로 난 길이다.
인북로를 건너 서쪽 경사길을 오르던 김 회장이 오른쪽 주택가를 가리키며 "여기에 큰 붉은 벽돌공장이 있었어" 한다.
김 회장이 걸아가면서 가늠하는 벽돌공장은 급경사가 완만한 경사로 바뀌는 지점에서 야산의 정상에까지 이르렀다.
익산대로 52길을 교차해 동쪽으로 이어지는 옛 황토길(인북로 54길)
'선화로 47길'에서 전북기계공고(옛 전북공대)를 왼쪽으로 끼고 서쪽으로 향하는 옛 황토길(인북로 54길)
과거 붉은 벽돌공장이 있었던 자리(주택가)
"여기가 전부 황토밭이었어. 시청이고 도로고 건물이고 아무것도 없을 때 왼통 황토였지. 그때는 이리고 북쪽에 동중이 있었는데, 동중에서 북쪽 철조망을 넘으면 적벽돌 공장이 있었어. 그 때는 이 길이 유일했지. 백년 넘은 동서로였어."
사라지다
추억을 소환하듯 설명하며 앞서 가던 김 회장이 남쪽으로 난 골목길을 가리키며 "저기가 동중 철조망이 있었던 곳일 거야" 한다.
그리고 30여보 가량 걸어가던 그가 멈춰섰다. 한 원룸 앞이었다. 길은 계속 곧바로 나아가고 있었지만, 그는 "길이 끊겨버렸네" 한다.
"이리고 울타리 옆을 타고 내려가면 서울가는 길(선화로 31길)로 들어갈 수 있었는데" 우리는 원룸 안쪽으로 들어가 봤지만 원룸의 콘크리트 담장이 가로막고 있다.
100여보 가량 됐음직한 옛길은 그렇게 끊겨 주택가 숲 속으로 사라졌다.
우리는 새로난 길을 따라 선화로 31길로 들어가서 남쪽으로 내려갔다. '선화로 31길' 쪽에서 옛길의 초입을 찾아볼 요량이었다.
그러나 도로변의 건물들은 옛길의 흔적을 완전히 지우고 있었다.
우리는 '선화로 31'에서 영정통쪽으로 이어지는 오른쪽 '선화로 31길'과 대전사거리로 이어지는 '선화로 33길'을 망연히 바라보다가 발길을 돌렸다.
우리는 되돌아오는 길에 마을사람을 붙들고 본래 있던 길을 왜 원룸 담장이 가로막았는지 아느냐고 물었다.
마을사람은 "땅 주인이 막았다"고 간명하게 말하고는 휑하고 가던 길을 간다.
돌아오는 길에 김 회장이 비위 상한 표정으로 고리대금이 뭔지 아느냐고 우리들에게 묻는다.
대답하기 전에 그가 답을 말한다. "급전이 필요한 사람한데 돈을 빌려주면서 땅문서를 담보로 잡는거야. 그런데 돈을 갚는 날 피해 버려. 채무자가 채권자를 만나지 못해서 돈을 갚지 못하게 되는 거지. 그러면 그 땅을 빼앗는 거야. 채권자가 따지면 당신이 돈을 갚아야 하는 날 갚지 았았지 않느냐고 하는 거야."
그런 시절이 있었을까 하는데, 김 회장이 말을 잇는다. "그래, 익산에 그런 악질 고리대금업자가 세 사람이나 있었어. 그 사람들 땅을 거치지 않으면 길을 갈 수가 없다고 말했던 때가 있었지. 특히 이 주변 일대 땅을 마구잡이로 사들인 고리대금업자가 있었는데, 그 말을 실감했었지."
그런 암흑기라면 한 사람이 길을 완전히 지워버릴 수도 있었겠구나 하고 수긍하게 된다.
글 공인배·사진 송승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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