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들을 수용하면서 보다 탄탄하고 유용한 도로를 만들어왔다. 새 도로와 확장된 도로는 또 도시의 형태를 바꾸는 동인(動因)이 된다. 우리는 그 탄탄대로 위를 자동차에 의탁해 보다 빠르게 달리며 갈수록 넘쳐나는 자동차들을 스치며 각종 신호들을 만나게 된다. 달릴 때나 설 때나 이완의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도로 위에서, 소통신문은 길을 물었다.
우리가 두 발로 손수 걸을 수 있는 길들은 어디로 갔는가. 누구랄 것이 없이 비켜서야 할 만큼 좁은, 그래서 눈인사를 절로 주고받게 되는 길은 어디로 밀려났는가. 늦은 밤 돌뿌리나 괴한이 걱정돼 가족을 마중나온 사람들이 서성이는 골목은 어디에서 잊혀져가는가. 스마트폰 없이도 바람과 풀벌레 소리, 집집에서 흘러나오는 웃음소리와 온갖 삶의 냄새를 찾아나서기로 했다.
우리의 기억들은 작은 길에서 큰 길로 빠르게 빠져나갔지만, 앙금이 된 기억은 어느 길 위에도 남아 있기 마련이리라. 잊어선 안 될 기억들을 만난다면 오늘 소통신문의 막연한 외출이 가치를 얻게 되는 것이리라. 길은 길 나름의 기억을 지니고 현재와 내일로 연결되며, 길은 곧 사람이니 길과 사람을 길 위에서 만난다는 것 자체가 오늘을 사는 우리의 힐링이 아닐까.
'익산의 길을 따라 소통하다'는 그런 질문들의 출발점이다.
<편집자주>
'인북로 54길'변의 아기별어린이집
구 남중가축병원 자리
100년 넘은 옛길을 서쪽에서 동쪽으로 걸어 인북로를 건너면 옛길은 '인북로 54길'이라는 이름으로 이어진다.
아기별어린이집을 끼고 동쪽으로 향하는 이 길가에는 꽤나 큰 2층 건물이 있는데, 이곳이 가축병원이 흔치 않던 시절의 '남중가축병원'이다.
김영규 회장의 기억 속에 있는 이 가축병원은 소나 돼지를 주로 진료하던 곳이었다.
북부시장이 가깝고 주변에 축산농가들이 산재하던 시절이어서인지 잘 되는 병원이었고, 그 때문에 익산에서 꽤나 유명세를 떨치던 병원이었다.
이 건물을 지나쳐서 60여보 쯤 동쪽으로 옛길을 밟아가다보면 왼쪽(북동쪽)으로 빠지는 '동서로 20길'을 만나게 된다. 김 회장은 이 길 주변을 가리키며 "여기가 35년 전까지는 다 고구마밭이었어"하더니 "이 쪽도 다 그 고리대금업자 땅이었다니까. 그 사람 땅을 거치지 않으면 걸어갈 수 없었어"
자본주의가 우리 사회를 단숨에 집어삼키던 시절의 얘기다.
자본의 폭력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던 사람들과 자본주의의 기승을 미처 따라잡지 못하는, 자본의 횡포 앞에 무정부나 마찬가지였던 국가의 얘기다.
김 회장의 삶, 그 황금시기가 그 시절을 통과했다.
김 회장과 동시대를 산 사람들이 겪은 자본주의의 피격과 그로 인한 트라우마는 쉽게 가늠되지 않는다.
"익산의 3대 악질 고리대금업자들이 몽땅 삼청교육대에 끌려갔어. 혼쭐이 났지. 풀어주는 대가로 기부금을 내라고 하니까. 서로 기부금 배팅을 했다는 것 아니야. 하하"
트라우마란 국가의 근거 없는 폭력조차 일부 용인할 정도일까.
수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피눈물을 흘리게 하고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뜨린 사람들을 기왕에 잡아갔으면 왜 그리 쉽게 풀어줬을까 하는데, 김 회장이 "보여주고 싶은 게 있다"며 '동서로 20길' 쪽으로 내려선다.
고리대금업자들의 길
'인북로 54길'과 동서로를 연결하는 '동서로 20길'
민영연립
이 '동서로 20길'은 '인북로 54길'과 '동서로'를 연결하는데, 주택가를 관통하는 이 길은 '인북로 58길'을 교차한 뒤 동서로에 닿게 된다. 동서로의 북측변에는 소라산이 있다.
100미터 가량 완만한 경사길을 내려가니 왼쪽에 철지난 스타일의 '민영 연립'이 한적하게 앉아있다.
시영주택 지붕
시영주택가 초입의 삼각형 주택
김 회장은 오른쪽으로 자로 잰듯 곧게 뚫린 골목을 가리킨다. "여기가 1970년대 말에 지어진 25평짜리 시영주택이야. 여긴 수퍼였는데." 폭이 여섯보 가량 되는 골목 입구에는 삼각형 모양의 건물이 골목 쪽으로도 얼굴을 내밀고 '동서로 20길' 쪽으로도 얼굴을 내밀었다.
이 수퍼 건물은 처음부터 효율을 고려해 지은 듯 하다. 김 회장은 골목을 들어서면서 주택 문 옆의 한 지점을 가리키며 "저기를 보라"고 한다. 네모 반듯하게 구멍이 뚫려 있다.
자세히 보니 모든 건물의 같은 지점에 같은 크기의 구멍이 뚫려 있다.
"저기가 재래식 화장실 구멍이야. 위생공사 탱크로리 차를 길 옆에 대고 호스를 집어넣어 분뇨를 퍼가기 좋게 만들어진 거지" 그 말을 들으며 보니 길 양쪽의 주택들은 건축양식이나 모양, 크기가 틀에 넣고 찍은 것처럼 똑같다.
게다가 건물과 건물이 간격도 없이 붙어있어서 마치 단층형 아파트 같아 보인다. 주차공간이 있을 턱이 없다.
시영주택 화장실
골목 밖에서 안쪽으로 바라본 시영주택가
조금 답답해져 미간을 찌뿌리는데 김 회장이 불쑥 "그런데 어느날 말이야" 하며 주의를 끈다.
"어느날 출근하는데 저 집 아이가 화장실에 빠진 거야"
우리는 일제히 그 집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람살리는 소리에 경황 없이 뛰어들어가서 그 애를 건져냈잖아. 그러고 옷을 갈아입었는데도 하루종일 몸에서 냄새가 나 어쩔 줄 몰랐어. 그런데 말이야. 그 부모들이 그 뒤로 한 번도 고맙다고 말 한마디 하지 않더라니까"
우리는 공연히 부끄러워져서 시선을 그 집에서 거둬 먼 산으로 돌렸다. 차를 이 골목에 댈 수도 없겠다는 말에 김 회장이 "요즘 젊은 사람들은 여기와서 살고 싶어하지 않지. 그래도 그 때는 여기 입주해서 사는 사람들이 중산층은 됐어. 차를 주변 이면도로에다 놓고 걸어오지만 말이야"
골목 끝으로 가서 김 회장이 신혼시절 살던 집 주변을 두리번 거리다가 '동서로 20길'로 되돌아 나와 북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시영주택에서 북쪽으로 50여보에 이르는 왼쪽에도 대동소이한 주택들이 나름의 간격을 두고 죽 도열해 있다.
뜻밖의 추억
'인북로 58길'변의 북초등학교
북초등학교 앞길(인북로 58길)
택지정리지구를 분양받은 업자들이 지은 주택들
김 회장은 "본래 이곳은 전부 밭이었는데, 익산시가 70년대 말에 택지를 조성해서 업자들에게 분양했던 곳이다"고 설명한다.
이 택지의 북쪽 끝에서 40보 가량 가면 '인북로 58길'에 합류한다. 제법 넓은 2차선 도로인 '인북로 58'길은 서쪽의 북부시장과 동쪽 주택가 끝에 있는 '동서로 22길'을 연결한다. '인북로 58길'의 북측 변에는 북초등학교가 있는데, 이 학교는 '인북로 58길'의 3분의 2가량을 점유하고 있다.
김 회장은 이 북초등학교 앞 도로를 가리키며 "원래 여기에 동쪽 주택가에서 북부시장 쪽으로 개골창이 흘렀는데, 그 위에 복개를 하고 이렇게 반듯한 도로를 낸거지"
'인북로 54'길과 '인북로 58길' 안에 있는 시영주택을 비롯한 단독주택지 동네는 과거 '꽃밭재'라 불리던 이른바 문화촌이다.
소라단 남쪽 소나무 숲
소라단 공원으로 연결되는 산책로
지금은 노인들만 남은 동네지만 70년대에는 서민들이 넘보지 못했던 양옥주택가였다.
우리는 소라단 공원(동서로)쪽인 '동서로 22길'을 따라가다가 40보 가량 되는 곳에서 오른쪽으로 빠지는 길로 방향을 꺾었다. 길은 완만하게 오르막길이다.
왼쪽으로 소나무 숲이 있고, 길에서 숲쪽으로는 약간 가파른 오름이다. 왼쪽 소나무숲이 산 정상이고 우리가 서 있는 곳은 산자락을 따라 난 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동서로가 나기 전에는 같은 소라단이었는데, 길에 의해 갈라졌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유추하게 하는 지형이다.
길을 따라 가다보니 이 산의 정상부이자 길의 막다른 곳에 높고 뾰족하게 서있는 '불꽃교회'가 시야를 가리며 서 있다.
"더 높이 올라가면 신과 가까워진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어. 바벨탑이 그래서 생긴 거잖아" 김 회장의 말을 들으며 도착한 불꽃교회 앞으로 소나무 숲의 산책로가 연결된다.
이 길을 따라가다가 동서로를 건너면 바로 소라단에 닿게 된다.
불꽃교회
불꽃교회 앞에서 남쪽으로 연결되는 유일한 길은 '선화로 47'길이다. 이 길 안에는 '남성 경로당'이 있다. 우리는 옛 길인 '인북로 54'길로 되돌아 들어간다. 서쪽으로 가다보면 문화촌을 한 바퀴 돌아 오른쪽으로 빠지는 '동서로 20길'을 다시 만나게 된다.
'동서로 22길'과 연결된 '선화로 47길'
남성경로당
김 회장은 옛길을 따라 걷는 동안 과거 부동산 늘리기에 혈안이 되었던 고리대금업자들이 떠올랐는지 혼잣말처럼 "쉽게 얻은 재물은 오래 못 가. 성경보다 더 진리야" 한다.
글 공인배·사진 송승욱 기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