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들을 수용하면서 보다 탄탄하고 유용한 도로를 만들어왔다. 새 도로와 확장된 도로는 또 도시의 형태를 바꾸는 동인(動因)이 된다. 우리는 그 탄탄대로 위를 자동차에 의탁해 보다 빠르게 달리며 갈수록 넘쳐나는 자동차들을 스치며 각종 신호들을 만나게 된다. 달릴 때나 설 때나 이완의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도로 위에서, 소통신문은 길을 물었다.

우리가 두 발로 손수 걸을 수 있는 길들은 어디로 갔는가. 누구랄 것이 없이 비켜서야 할 만큼 좁은, 그래서 눈인사를 절로 주고받게 되는 길은 어디로 밀려났는가. 늦은 밤 돌뿌리나 괴한이 걱정돼 가족을 마중나온 사람들이 서성이는 골목은 어디에서 잊혀져가는가. 스마트폰 없이도 바람과 풀벌레 소리, 집집에서 흘러나오는 웃음소리와 온갖 삶의 냄새를 찾아나서기로 했다.

우리의 기억들은 작은 길에서 큰 길로 빠르게 빠져나갔지만, 앙금이 된 기억은 어느 길 위에도 남아 있기 마련이리라. 잊어선 안 될 기억들을 만난다면 오늘 소통신문의 막연한 외출이 가치를 얻게 되는 것이리라. 길은 길 나름의 기억을 지니고 현재와 내일로 연결되며, 길은 곧 사람이니 길과 사람을 길 위에서 만난다는 것 자체가 오늘을 사는 우리의 힐링이 아닐까.

'익산의 길을 따라 소통하다'는 그런 질문들의 출발점이다.

<편집자주>

"1970년 초 박정희 정부가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수립했어요. 각 지방에서 공업단지 조성 붐이 일었지. 염동찬 익산시장도 기관장 자문위원회에서 '이리에도 만들자'고 나섰어. 43만평짜리 익산 제1공업단지를 조성하게 된 거야."

영등동 쪽 고봉산의 정상부에 있는 청복교회

청복교회에서 바라본 라인아파트

김영규 회장이 청복교회 주차장에서 동쪽 주택가 너머에 있는 공단을 바라보고 서서 50년 전의 기억을 생생하게도 풀어놓는다.

"1971년에 착공된 이 공단은 1974년 말에 완공됐어. 바로 입주업체 모집에 들어갔지. 그런데 말이야. 분양이 잘 안 되는 거야. 미입주 상태가 장기화되면서 재정압박이 심해졌지. 그런 와중에 박정희가 여산 부사관학교에 참석차 헬기타고 왔다가 광주로 가는 길이었지. 박정희가 밑을 내려다보니 평평한 야산인 거야."

김 회장의 표정이 익살스러워진다. "임자 저기에다 포도나무 심어. 그걸로 포도주를 만들면 독일이나 불란서처럼 농민들 수입이 늘어날게야 라고 옆에 있던 건설부장관한테 그렇게 말했다는 거지. 그랬더니 삼기·여산이 순식간에 포도밭으로 변했다는거잖아. 근디 각하의 포도주 경제는 실패하고 말았어. 생산되는 포도 당도가 너무 낮아서 판매할 만한 포도주를 만들 수 없었던거야."

입꼬리를 삐죽 내밀던 김 회장의 표정이 일순 밝아진다. "근디 그날 헬기가 공단 위를 자나간거지. 옆에 있던 상공부장관한테 박정희가 그런 거야. 임자 저 공단을 상공부 직할 공단으로 바꿔줘. 수출자유지역으로 바꿔주면 분양이 잘 될 게야 라고."

각하의 시대는 역시 대단했다.

각하의 말은 불가능이 없었고, 각하는 말을 책임지지도 않았다.

어쨌거나 수출자유지역 지정은 공단 분양에 날개를 달아줬다. 공단에는 77개업체가 입주했고, 2,547명이 고용됐다.

"그 때 무주, 진안, 장수 같은 깡촌에서 파릇한 사람들이 많이 왔어. 저 아래 그 공돌이 공순이들이 살았던 벌집방들이 아직도 많아. 콘크리트 칸막이를 사이에 두고 쪽방살이를 하던 처녀 총각들이 어느 날 보면 동거를 하고 있던 시절이었어."

우리는 김 회장의 말을 들으며 '선화로'의 곁길인 '선화로 59길'을 따라 북쪽으로 흘러내려갔다.

선화로의 곁길 '선화로 59길'

그렇다. 청복교회를 정점으로 한 주변 일대는 고봉산 줄기다.

저 아래 '동서로'나 공단 앞까지 거미줄처럼 뻗은 길들이 급경사를 이루는 이유다.

청복교회는 영등동 쪽 고봉산의 정상부다.

서쪽으로는 '영등 라인아파트'가 있고, 서쪽 방향으로 흘러내린 길들은 '고봉로'에 합류한다.

북쪽으로 흘러내린 길은 '동서로'에 합류한다. 남쪽에 있는 선화로는 청복교회보다 높은 지대에 위치한다.

각하의 시대, 불가능은 없었다

김 회장은 한 식당 앞에서 "여기가 쌍과부집이야" 하더니 얼핏 수줍은 표정을 짓다가 "오랫 동안 손님들이 바글바글했었어. 근디 어떤 식당이든 주점이든 홀로 운영하는 곳에 남자들이 많이도 꼬이는데, 여주인이 어떤 남자를 만나면 어떻게 알고 아무도 그 집엘 가지 않아. 이 집은 아직도 변함없겠지?"

자신이 뱉은 신소리를 의식했는지 김 회장이 미끄러지듯 곧장 나아가는 골목으로 들어선다.

길은 좁아졌지만 여전히 '선화로 59길'이다. 길가에 열매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자두나무가 싱그럽다.

길가의 자두나무

쌍과부 집에서 50여보 가량 걷던 김 회장이 오른쪽으로 빠지는 곁골목으로 들어선다.

길은 더 좁아졌다.

'선화로 59길' 초입에 있는 허물어진 집들

골목 오른쪽의 공터 건너편에 지붕이 일부 무너진 벌집방들이 버려져 있다.

골목 아래로 몇 보 옮기지 않았는데 전형적인 벌집방 건물이 골목을 끼고 있다. 벌집방 출입로 안으로 들어가자 줄지어 있는 각 방의 출입문들을 만나게 된다.

버려진 벌집방들

벌집방 출입로

벌집방 현관문들

경로당을 지나 계속 아래로 내려가면서 벌집방들을 만난다. 쪽방촌 골목은 '보석로 3길'로 합류한다.

청복경로당

함석문 벌집방

'보석로 3길'가의 벌집방

'보석로 3길'의 아래쪽

우리는 계속 흘러내려가는데, 합류지점에서 본 함석문 벌집방의 잔상이 채 가시기 전에 길가 쪽으로 창문을 낸 벌집방을 만나게 된다.

내려가면서 만나는 길 오른편과 왼편은 사뭇 다르다.

오른편은 산 위쪽이고 왼편은 산 아래쪽이다.

쪽방촌은 산 위쪽에 주로 형성되어 있고, 아래쪽 건물들은 산 위쪽보다 뒤에 지어진 듯 형태나 규모 면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말하자면 익산에는 고봉산이 있다. 하지만 산업화의 태풍이 숲을 휩쓸었고, 그 위를 건물들이 덮었다.

다만 길만이 거기에 산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

고봉산은 익산에서는 큰 산에 속하지만, 도심속에 묻혀 여느 고만고만한 산들 가운데 하나로 여겨지는 것이다.

'보석로 3길'가의 조릿대 숲

오거리가의 원룸

'보석로 3길' 옆의 조릿대 숲도 아직 완전히 물러나지 않은 산의 드러남이리라. 합류지점에서 80여보 내려가다 보면 '보석로 3길'이 오거리 안으로 자취를 감춘다.

오거리는 공단도로인 '보석로'와 '선화로 59길'의 초입을 동서로 연결하는 '보석로 1길'의 중간쯤에 서쪽에서 온 '보석로' 곁길, 서쪽에서 온 '선화로 59길' 곁길, 북쪽에서 온 '보석로 3길'이 합류하며 이루어진다.

오거리 주변은 듬성듬성이지만 지은지 얼만 안 된 원룸, 단독주택들이 반짝반짝 빛난다.

우리는 서남쪽으로 급경사를 이루는 '보석로 1길'을 따라 선화로에 올랐다. 멀리서 보면, 저 아래 '보석로'는 북단 약촌오거리에서 남쪽으로 곧게 달려 '선화로'를 교차한 뒤 남단 '선화1로'를 연결하며 1.2km가량을 뻗어있다.

'선화 1로 3길'

50년 전에서 멈춘 시간

그 보석로 동쪽에는 공단이 있고, 서쪽에는 공단과 함께 조성 된 주택가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고봉산 정상쪽에 있는 나머지 주택가를 보기 위해 보석로를 타고 남쪽으로 가다가 태창섬유를 지나 '보석로 4길'이 교차하는 곳에서 오른쪽(서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폭이 3보 정도 되는 비포장 길(선화1로 3길)은 50보가량 완만한 경사길을 올라가니, 오른쪽에 뽕나무밭(오디농장)이 고봉산 정상과 연한 서남측 비탈면에 조성되어 있고, 사람들이 한창 검붉은 오디를 수확하고 있다.

오디밭 옆 길

우리는 서쪽으로 곧게 뚫린 콘크리트 포장길(선화1로 3길)을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길 왼쪽은 과수원과 밭이 저만치 숲에 연해 있고, 빈 공장 건물과 빈 주택들이 삭막한 시간을 건너온 흔적처럼 줄이어 서 있다.

우리는 첫번 째 삼거리에서 '선화로 22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길은 서북쪽으로 향하는데 고봉산 정상으로 오름을 이룬다.

마동 주공아파트 2단지

'선화로 22길'

김 회장이 왼쪽 마동 주공아파트를 가리키며 "여기가 연탄으로 난방을 하는 마지막 아파트야. 아마도 지금도 연탄을 땔 걸" 한다. 그의 말에 50년 전의 공간에 떨어진 듯 아득한 느낌이 든다. 길 양 옆 주택의 좁은 마당이며 정원에 유독 많이 서 있는 형형색색 접시꽃도 얼핏 낯설어진다.

125보 가량 올라가다가 처음 만난 오른쪽 골목(선화로 26길)으로 60여보 가량 들어가던 우리는 '선화로 22길'로 다시 되돌아나와야 했다.

'선화로 26길'

'선화로 22길'가 주택의 접시꽃

'선화로 18길'가에서 올려다 본 주택

그 길은 오디밭 옆으로 난 좁은 길을 따라 '선화1로 3길'로 연결되고 있었다.

선화로 22길은 둘로 갈라지는데 우리는 왼쪽 길(선화로 18길)을 택했다. 길은 경사길을 이루고 위쪽의 건물들이 깎아지른 벼랑 끝에 서 있는 듯 위태롭기도 했다.

갈림길에서 80여보 가량 되는 우측에 효자와 열녀비가 나란히 서 있는 비각을 만났다.

효자와 열려각 및 적선비

윤필성 효자와 밀양박씨 열녀를 기리는 비각인데, 단청은 낡았지만 그 울타리 안에 후손들이 희사한 재물로 비각을 새운 내력이 새겨진 적선비를 보면, 그 집안의 효를 숭상하는 마음이 지나는 사람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진다.

'선화로 18길'은 동부시장 오거리 남단으로 연결된다.

글 공인배·사진 송승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