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들을 수용하면서 보다 탄탄하고 유용한 도로를 만들어왔다. 새 도로와 확장된 도로는 또 도시의 형태를 바꾸는 동인(動因)이 된다. 우리는 그 탄탄대로 위를 자동차에 의탁해 보다 빠르게 달리며 갈수록 넘쳐나는 자동차들을 스치며 각종 신호들을 만나게 된다. 달릴 때나 설 때나 이완의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도로 위에서, 소통신문은 길을 물었다.

우리가 두 발로 손수 걸을 수 있는 길들은 어디로 갔는가. 누구랄 것이 없이 비켜서야 할 만큼 좁은, 그래서 눈인사를 절로 주고받게 되는 길은 어디로 밀려났는가. 늦은 밤 돌뿌리나 괴한이 걱정돼 가족을 마중나온 사람들이 서성이는 골목은 어디에서 잊혀져가는가. 스마트폰 없이도 바람과 풀벌레 소리, 집집에서 흘러나오는 웃음소리와 온갖 삶의 냄새를 찾아나서기로 했다.

우리의 기억들은 작은 길에서 큰 길로 빠르게 빠져나갔지만, 앙금이 된 기억은 어느 길 위에도 남아 있기 마련이리라. 잊어선 안 될 기억들을 만난다면 오늘 소통신문의 막연한 외출이 가치를 얻게 되는 것이리라. 길은 길 나름의 기억을 지니고 현재와 내일로 연결되며, 길은 곧 사람이니 길과 사람을 길 위에서 만난다는 것 자체가 오늘을 사는 우리의 힐링이 아닐까.

'익산의 길을 따라 소통하다'는 그런 질문들의 출발점이다.

<편집자주>

"해태·롯데가 양대산맥을 이루던 시절에 익산에 오리온 공장이 세워졌어. 그리고 제과 재벌들의 등쌀을 이겨낸 거야. 초코파이 하나로 말이지. 재벌이 왜 껌이나 빵에까지 손을 대나 하겠지만, 그게 땅 짚고 헤엄치기니까 그렇지. 배고프던 시절 밥 대신 먹었던 빵이야. 구멍가게나 수퍼에서 안파는 곳이 없었어. 그리고 빵은 곧바로 현금이 됐어. 빵을 외상으로 사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성모병원 쪽에서 바라본 오리온 익산공장

성모병원

성모병원 앞에서 오리온 공장을 바라보는 김영규 회장은 할 말이 많았다.

"오리온 공장은 공단 쌍방울 앞에도 있어. 초코파이는 오리온이 최초로 만들었고 독보적이지. 중국 사람들이 좋아하니까 중국에서 만들었어. 그런데 실패했잖아. 더운 곳에서는 녹아버리니까."

김 회장은 말을 끊고 잠시 향수에 젖은 표정이 된다.

" 이 근방 오면 초코렛 냄새며 빵굽는 냄새가 좋았어. 미군들이 지프차를 타고 지나가면 애들이 뒤따라가면서 '기브미 초콜렛' 하면서 쫓아가던 시절에는 더 냄새가 짙었었지. 미군이 초콜렛이나 껌을 던져주면 서로 주우려고 싸우던 비참했던 시절엔 말이야."

오리온 익산공장과 성모병원을 양쪽에 거느리는 길은 '고봉로'다.

고봉로는 고봉산을 남북으로 넘으면서 도심의 동서로·선화로·중앙로를 교차하는 간선도로다.

북단에서는 무왕로를 만나고 남단에서는 서동로를 만난다.

고봉로는 다른 간선도로들과 달리 넓어졌다가 좁아졌다가 하지만 매일 소화하는 교통량이 다른 도로에 결코 밀리지 않는다.

고봉로를 눈여겨보면 고봉산이 사통팔달 교통망의 중심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성모병원은 고봉산의 북쪽 허리쯤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오늘 우리의 여정은 동부시장 주변이다.

동부시장은 성모병원보다 더 높은 능선에 위치하는데, 양쪽을 동서로가 갈라놓고 있다.

"빵굽는 냄새가 좋았어"

"성모병원은 천주교에서 만든 병원이지. 처음에는 병원이 주였는데 지금은 요양원으로 운영되고 있는 것 같아. 지역의료계가 열악한 시기에 전주에는 기독교 계통 의료기관이, 익산에는 천주교 계통 의료기관이 생겨났었지. 1980년대에는 성모병원이 익산에서 가장 큰 병원이었는데 말이야."

동서로를 건너려고 신호를 대기하던 중이었다.

무신론자에 가까운 김 회장은 전후 종교단체가 끼친 영향을 생각하다가 갑자기 유신론자가 된 듯 했다.

"연세대는 세브란스병원, 고려대에는 고려대학병원이 있듯이 양 종교단체 의료기관이 의학발전의 초석이 된 거야. 종교는 병든 정신을 치료하고, 의술은 병든 몸을 치료하고, 종교계통 사람들이 심신을 치료한 거지."

영등 주공아파트 옆 고봉로

우리는 동서로를 건너 고봉로변의 영등 주공아파트 옆 벚꽃 가로수 그늘 아래에 당도했다.

하지만 김 회장은 열변은 아직 식지 않았다.

"인간이 살아가는데 종교는 꼭 필요하다니까. 없다면 살벌하잖아. 거짓, 음모,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범죄성향... 가슴 밑바닥에 종교적인 것이 꿈틀거리기에 나쁜 짓을 못하는 거잖아."

김 회장의 '종교 유익론'은 벚나무 그늘길을 걸어가다가 멈춰서서 요새 보기드문 영등 주공아파트 울타리 안쪽에 시선을 돌리면서 비로소 멈췄다.

영등 주공아파트 고봉로쪽 입구

영등주공아파트 울타리 안쪽

"여기도 오래된 아파트지. 5층짜리 주공아파트 중에는 익산에서 가장 나중에 지어졌지만, 여기도 연탄보일러를 땠어. 지금은 어떨지 모르지만."

김 회장의 말을 따라 무심코 아파트 울타리 안쪽을 둘러보게 된다.

우리는 이미 아파트 안쪽의 넉넉한 공간에 시선을 사로잡혀 있는 터였다. 동과 동 사이에 주차장이 있어도 모자랄 판인데, 칸 하나씩을 걸러 정원수 숲을 이루고 있는 공간의 풍광에 취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오래된 아파트의 바랜 빛이나 난방 방식이 어떤지에는 좀처럼 시선이 옮겨지지 않는다.

오직 아파트 안쪽의 무성한 정원수와 정원수 사이를 보다가 조금은 혼란스러운 마음을 거둬야 했다.

우리는 괜히 바쁜 사람들처럼 동부시장 쪽으로 잰걸음을 옮겼다.

동부시장 북편은 '선화로 51'이 옛길(선화로 47)과 고봉로를 곧게 연결한다.

남쪽 경계는 '선화로 49길'이 구분하며 반석교회를 거느리고 옛길(선화로 47길)과 고봉로를 곧게 연결한다.

서편 경계는 '인북로 48길'이 지었다.

'인북로 48길'과 고봉로까지 약 100보 가량, '선화로 51길'과 '선화로 49길'까지 약 150보 가량 되는 장방형 안에 동부시장이 들어있는 것이다.

동부시장 전경

고봉로쪽으로 난 동부시장 정문

아직도 생생한 기억 '눈물고개' 시장

김 회장은 앞장서서 시장 안으로 쑥 들어가며 말한다.

"여기가 익산에서는 최초로 건물안에 갖출 것은 다 갖췄던 할인매장식 시장이야. 물론 시장이 쇠퇴하면서 많이 빠졌지만 말이야." 둘러보니 언뜻 보면 먹거리 일색이지만, 나름 구색은 갖춰져 있는 듯 하다.

동부시장 내부

우리는 시장 중앙 통로를 통해 서쪽 주차장으로 나갔다.

김 회장이 별도로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해서였다. "사실 이곳은 지저분한 과거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어. 시장 사람들은 희망이 끊긴 현재에 적응하고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

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오래 전 얘기야. 대우가 최신시장을 만들겠다며 저쪽에 있던 재래시장 상인들을 지금이 이 건물에 몰아넣었어." 김 회장이 저 위쪽(선화로 49길 변)을 가리킨다.

"저기에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재래시장이 있었어. 저기에다가 최신시장을 만들면 우대하겠다며 이 건물에서 임시로 장사를 하고 있어라 했던 대기업이 어느 날 철수를 해버린 거야."

본래 재래시장이 형성되었던 곳이라는 서남쪽을 바라본다.

잡초가 우거지고 심지 않은 잡목들이 듬성듬성 서 있다.

도심 속의 황량한 섬 같다는 생각을 하는데 김 회장이 "여기에 본래 둠벙이 있었어" 한다.

이런 산중턱에 물이 고인 웅덩이가 있었다는 말에 주변이 갑자기 생경해진다.

"말하자면 이 임시 동부시장은 둠벙을 메우고 그 위에 지은 거야. 다행히 익산시 땅이어서 가능했던 거지. 그때는 상인들이 얼마나 꿈에 부풀었겠어. 본래 시장 자리에 현대식 시장도 짓고, 주상복합 건물도 짓고, 제일 좋은 호텔도 지을 것이라는 약속을 대기업이 했는데 말야."

꿈이 컸다면 좌절도 큰 법이다.

대기업이 갑자기 떠난 뒤의 망연자실하는 상인들 얼굴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김 회장이 그 비극을 거울에 비추듯 말한다.

"대책반을 만들었지. 대응하다가 기다리다가 결국에는 보상도 못 받고 다 날렸어. 주저앉아서 장사하는 것만이 버티는 유일한 수단이었지."

고봉산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바람에 산의 모습을 잃었고, 각박한 인심은 수많은 사연을 만들어 놓았구나 싶다.

동부시장의 황량한 주변은 아직도 생생한 슬픈 기억이다.

하지만 다른 것으로 채워지지 않는 옛 장터는 여전히 남아있는 상인들의 희망이 아닐까 여겨지기도 한다.

글 공인배·사진 송승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