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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화 #1. 통일시키고 뭉쳐 단순화 시켰을 때 희열을 느끼다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한 것을 평면에 옮기는 사람.

오감을 통해 수용한 것을 자신만의 관점으로 재해석하는 사람.

사물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포착하는 사람.

도시의 지금을 기록하는 사람.

화가의 빛은 실체를 관통한다.

화가의 어둠은 실존을 고민한다.

지역의 화가는 향토사학자다.

소통신문은 각기 다른 화가들은 만나

저마다의 육성을 기록하고자 한다.

그림에 임하는 화가의 태도

혹은 삶에 임하는 화가의 태도에 따라

다른 이야기들이 우리를 기다릴 것이다.

일상에 떠밀려가는 우리가

일상을 숨죽이고 관찰하는

화가들을 통해 유의미한 가치들을 건져 올릴 수 있기를 기대한다.

화가가 포착한 이 도시의 아름다운 이미지들은

우리가 무수히 지나쳐버리는 것 들일 것이기에

소통신문은 지역의 화가들을 관찰하고자 한다.

<편집자주>

나에게 생활을 생략하는 것

그것을 그림으로 남기는 것

“그냥 제 생활이에요. 밥먹고 직장에서 일하고, 그림 그리고.”

화백 김영규씨(77세)는 ‘그림은 내게 뭘까’라는 질문에 “한 마디로 답하기 어렵다”면서도 일단 한 마디 안에 그 의미를 담았다.

그러면서 부족한 의미를 더 채운다. “인간은 흔적을 남기려해요. 자의든 타의든 그래요. 그런데 일상의 흔적들은 안타깝게도 사라져버리죠.”

하지만 ‘내게 그림은 생활이다’라는 정의에 얼른 부합되지 않는 ‘유한한 존재의 무상(無常)’을 불쑥 내미는 바람에 그가 말한 그림에 대한 정의를 순간 놓쳐버리게 된다.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말은 이어진다. “사라짐이나 망각은 신이 내린 가장 훌륭한 선물이죠. 만약 일상이 온전히 머릿속에 남아있게 된다면 그보다 불행한 건 없을 겁니다.”

타의적이거나 주체적인 망각, 그 인간이 존재하는 방식의 ‘생활’이 곧 그림이라는 의미로 들렸다.

뒤집어서 생각하게 된다. ‘그림 그리는 것도 일상처럼 흘러가는 것. 혹은 생활이란 사라지거나 망각되는 것이다.’하는 식으로 들어야 하는 걸까.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전달하고 싶었던 말은 “기억할 것만 기억하는 겁니다.”

그렇구나. 그의 그림은 사라지고 망각되는 생활 속에서 주체적으로 기억할 것만 추출한 기록이구나.

“나는 학생들을 지도할 때 학생이 그림을 그리면 불필요한 것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문질러요. 생략하는 거죠. 그림을 생략하는 작업, 극도로 생략되고 단순화 된 결과물, 그런 그림이 가장 훌륭한 거죠.”

아마도. 생활 속에서 무엇을 버려야 할 것이냐는 개별적인 문제일 것이다. 그림에 남는 것은 오직 자신이 선택한 기억의 결정일 것이다. 망각을 존재의 동력으로 삼도록 프로그래밍 된 자연(질선)이라 하더라도 그런 정도의 생활은 영속을 허용할 것이다.

“채에 걸러 한 두개 남는 것을 선택하는 거죠. 커다란 점을 나무로, 최대한 생략한 흔적이 나에겐 그림이에요. 없애버리는 작업이 나한테는 그림이 아닐까 싶어요.”

그렇다. 김영규 화백이 자신은 왜 추상화에 천착하고 있는가를 진술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생략하고 남은 결정을 “통일시키고 뭉쳐 단순화 시켰을 때 희열을 느낀다.”고 밝힌다.

버려진 것을 되살려내기

부당한 현실에 저항하기

일상의 어떤 것을 선택하는가를 물어 볼 필요가 없었다. 그는 그것, 자신이 가치있다고 생각하는 걸 말하기 위해 생략을 먼저 말한 듯 하다.

“도미에의 삼등열차처럼 그늘진 곳, 찌그러진 서민들을 대변하는 것, 부당한 정권에 대한 반항이 작가가 지향해야 할 태도라고 생각해요. 우리 사회 한 면의 고통과 무력감을 보는 것이 작가의 시선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삼등열차, 아이에게 젖을 물린 젊은 여인, 바구니를 손에 꼭 쥔 노파, 그 옆에서 조는 어린 아이의 모습에서는 모두 삶의 고단함이 배어 나온다. 다른 승객의 모습에서도 삶의 기쁨이나 희망은 찾아보기 어려운 1960년대 서민들을 포착한 프랑스 화가 도미에의 걸작이 뇌리에 스친다.

서로에게 무관심한, 그저 하루를 버티고 살아가는 데 필요한 양식을 얻은 일 외에는 다른 것에 관심을 둘 여유가 없는, 그렇기에 우울한 침묵이 짙게 내리누른 삼등열차 안은 오늘 우리 도시빈민들의 처지와 크게 다를 바가 있을까.

“예쁜 그림장사, 먹고사는 수단이 그거라면 어쩔 수 없겠지만, 사회참여 예술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화가라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아마도 전문적인 지식인으로서 화가가 선형적이고 폐쇄적인 구조를 통해 지식을 생산하고 유통하는 시대의 종언을 재확인하는 것일 터다. 화가가 구체적이며 현장에 밀착된 지식과 정보들을 대중과 함께 무수하게 생산하고 공유하는 새 시대의 예술지향을 말하고 있을 터다.

“오늘날 환경문제는 가장 심각한 문제예요. 버려진 것들에 대한 애착이 필요하고, 버려진 것을 어떻게 살릴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는 거예요.”

화백 김영규가 추구하는 예술이란 가상의 사회적 행위가 아니라 실질적인 사회적 행위를 바탕으로 하며, 그가 선택하는 예술의 소재는 반드시 현실 속에 있는 것이다.

“콜라는 먹지만 콜라병은 먹지 안잖아요. 병은 단지 보관하고 이동하는데 필요한 거지요. 콜라를 먹고나면 병은 버려지는 겁니다. 애초부터 정해진 거예요. 용도가 다했다고 버리기만 한다면 폐기물에 우리가 묻혀 죽는 시대가 곧 올겁니다.”

“폐기물의 가치를 나타내기, 또는 시장 한 켠에 앉아있는 할아버지를 그리기, 그 주름진 얼굴이나 마른 몸에서 깊고 높은 사랑을 드러내기 등 삶에 대한 애증을 표현하는 것이 나의 방향성입니다. 껍데기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 깊은 곳을 그려야지요. 고뇌와 고통 그 내면 말이에요.”

소외되거나 버려진 것들 안에서 가치를 발견한다는 것, 그것을 대중과 공유하고자 한다는 것, 다른 작가나 대중을 거기에 참여시킨다는 것은 그 자체로 혁명일 것이다. 그러한 행위는 또 인문과 예술 분야의 다양성과 융합 현상의 밑거름이 될 것이다.

“내 그림은 주로 폐품을 이용하는 작업에서 얻어진 결과물들이에요. 물감부터 공사장에서 쓰다 버린 싸구려 수성 페인트죠. 건물을 짓고 나면 남는 망치나 못을 가지고 작업을 하기도 하지요. 저희 집은 한마디로 쓰레기통이에요.”

그의 예술행위는 참여에 필요한 플랫폼이나 네트워크가 될 수 있을까. 그의 참여예술이 실천 정신 아래 지속되고 있지만, 지역이라는 협소한 지형 탓에 보다 광범위한 예술적 논쟁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 문득 안타까워진다.

보다 많은 참여와 상화 작용의 문화적 토양을 확보하기 위한 지역사람들의 노력 부재가 유난히 크게 느껴진다.

김 화백은 겹쳐 세워놓은 그림 몇 점을 꺼내서 세세하게 짚어 가며 작업 방법을 설명한다. “이게 골판지인데, 물을 살짝 뿌리면 겉이 떨어져요. 수평에 골이 있는 도화지가 되는 겁니다. 저는 붓을 쓰지 않고 주로 찌끄리고 문지르고 흘리는 방식으로 작업을 해요. 붓으로 그린다는 것은 한계가 있어서 말이에요.”

골은 육안으로도 보이기도 하지만 만져봐도 느껴진다. 어떤 부분은 문질러서 의도적으로 골을 없애기도 했다.

“물감을 흘리면서 사각틀의 방향을 바꾸면 수 없이 많은 사각형들이 만들어지죠. 도저히 그릴 수 없는 도형과 선이 생겨나는 것이지요. 얽히고 설킨 선들이 심상이나 복잡한 삶을 나타내는 거지요.”

그렇다. 내면으로 향한 김 화백의 그림들은 수많은 선과 도형을 일체화 한다. 거기에 응축된 에너지는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기하학적 형태들은 다층적이고 복층적인 인간들의 삶과 심상을 미학적으로 이미지화하고 있다.

특히, 그러한 결과물을 매개하는 버려진 것들(골판지, 장판지, 마분지, 마대자루)에 생명를 불어넣는 행위, 즉 찌끄리고 문지르고 흘리는 그의 ‘춤’들이 그가 사용하는 오방색과 오버랩되는 화면들은 상징화 된 접신굿의 활동사진 같기도 하다.

삶은 정점에 다다를 수록 단순화 돼

작가 김영규의 언어나 작품들은 쉽지 않다. 그가 확고한 자기 길을 찾아 걷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열정히 식지 않고 분출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홍대 미대라는 엘리트 코스를 밟았고, 국내에서 가장 권위있는 대한민국 미술대전(국전)에 수차례 입상했으며, 국전 심사위원장의 반열에 오르는 등 ‘일가’를 이룬 화가치고는 지나치게 늙지 않는 것이다.

과열된 경쟁사회의 상당수 화가들이 그렇듯이 그 역시 가족들로 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환영받지 못했다. 중학교 다닐 때부터 두각을 나타냈지만, 대회에 나가서 받아 온 상장은 아궁이 속으로 들어가기 일쑤였다. 대학에 진학한 뒤에도 아르바이트로 전전하며 학업을 돌봐야 했다.

그래서인지 살면서 가장 기뻤던 순간은 결혼한 지 1년 만에 집을 한 채 샀는데 아버지가 “어떻게 그림 그리는 놈이 집을 샀냐. 밥이나 안 굶으면 했는데 다행이다”고 했을 때였다. ‘그림 그리길 역시 잘했다’고 그때 생각했어요.

그에게는 그렇듯 잊혀지지 않거니와 잊을 수 없는 삶의 장면이 또 하나 있다. “77년에 이리역 폭발사고가 났을 때 폭발현장에서 400미터 떨어진 곳에 제 화실이 있었어요. 폭발로 인해 건물이 파손되고 유리창이 깨져서 학생들도 다치고 화실에 있던 재산이 다 날아간 상태였지요. 그런데 폭발사고가 난 지 채 1시간도 안 됐을 때 6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달려오신 아버지가 ‘영규야’하고 부르시길래 ‘네 아버지’하고 대답했더니 ‘나 갈란다’하고 가버리시는거야.”

아버지는 그렇게 무사한 걸 확인하고 앉지도 않고 갔지만 다음 날 오신 어머니는 달랐다. ‘다 부서져서 어쩐다냐’하면서 비로 쓸며 난리치시는 거예요. 그때 ‘남자로서 아버지 같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삶에는 그런 기억들이 있다. 그 기억들은 삶의 카테고리가 되며, 그렇게 삶은 죽음의 정점에 이르면서 단순화된다. 화가 김영규가 ‘그림도 불필요한 것은 생략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다.

김영규 화백이 그린 아버지와 자신의 자화상

부족하지만 지역에 기여하고파

그는 스스로를 성공하지 못한 화가라고 평가한다. “그림 그리는 소질을 있다고 생각하지만, 최고라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어요. 교단에 있을때 창작의 길로 들어서야겠다 마음 먹었을때 아무것도 떠오르는 게 없었어요. 그동안 연습한 것을 손재주로 그리는 것 말고는 소질이 없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대한민국미술대전의 심사위원장을 역임한 정도면 스스로 대가(大家)의 자부심을 가질만한데도 그의 자신에 대한 평가는 가혹하다. “내로라 할 만한 작가는 확실하게 아니라고 판단하고 있어요. 나만의 세계를 구축은 하겠지만, 나름대로 의미있는 불평을 하면서 후회없는 삶은 살지만, 성공한 화가는 아니며,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 실패한 사람이라는 건 잘 알고 있어요.”

그가 한국예술총연합회 익산지회장직을 맡아 오면서 맞닥뜨려 온 녹녹지 않은 현실 앞에서 느끼는 자괴감이 묻어나오는 말이다.

“선배로서 지역 후배나 제자들을 위해 행정가로 뛰어들었지만, 자치단체가 예술을 바라보는 눈길이 너무나 싸늘해요. 예술활동에 있어서 경제적인 것을 무시할 수 없는데, 도움을 주기가 너무나 어려운 현실이에요.”

화가 김영규는 독립적으로 능동적으로 선행적 가치를 수행하는 아방가르드식의 역할을 수행하는 화단의 일원이다. 그러면서도 관객과 소통하고 가능하면 관객과 작가 사이의 벽을 허물고 싶어한다. 그렇게 자신의 예술적 재능을 사회에 돌려주려고 끊임없이 시도하는 화가다.

그가 보다 광범위한 예술적 논쟁 속으로 들어가기를 바란다. 이 지역에 그를 품을 공간이 조성되기를 바란다.

글 공인배 · 사진 송승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