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대학교 익산캠퍼스 안에는 익산에서 가장 오래된 정원이 있다. 캠퍼스의 서쪽(후문) 가장 높은 지대 일원이다. 거의 숲이라 할 만한 이 정원에서 세 아름은 될 정도의 거대한 느티나무들은 92년을 거스르는 기억을 간직한다.
이 정원의 연조는 1922년에 개교한 이리농림학교와 같이 한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은 키와 둘레로 같은 세월을 공유하는 나무들은 여러 종이다. 전나무, 잣나무, 편백, 소나무, 단풍나무, 목튤립, 측백나무들이 광복 이전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이리농림학교는 전북대학교 농대 출발의 진원이며 익산대학의 전신이다. 11년 전 익산대학을 흡수 통합한 전북대가 이리농림학교의 유산을 원형 그대로 관리·보존하고 있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곳에 있는 나무들은 100년 가까이 살고 있지만 하나 같이 건강하다.
지형을 살펴 보면 본래 이 곳은 산 정상이다. 이리농림학교 본관은 정상부에 세워졌고, 교사동들은 동쪽으로 흘러내리는 산 능선부에 자리잡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의 전북대학교 익산캠퍼스 정문은 동쪽의 가장 낮은 산 초입에 있는 셈이다.
학교 정원의 서쪽 외곽에 바싹 밀착되어 있는 도로는 ‘중앙로 13길’이다. 이 길은 마동 사거리를 교차하는 중앙로에서 발원했는데, 산 정상부인 학교 울타리를 끼고 북쪽으로 가서 선화로에 접속하며 전북대오거리를 이룬다.

학교와 도로 사이를 구분하는 것은 조릿대와 왕벚나무, 측백나무 등의 군락이다. 이 울타리 바로 안쪽에는 이리농림학교의 가장 또렷한 흔적인 본관 건물이 자리잡고 있는데, 전체적으로 붉은 벽돌의 조적조 건물이면서 주출입구 상부의 계단실과 정면에 설치한 현관부(포치)를 화강석으로 쌓아 입면을 강조한 건축적 기법 등이 특징이다.
건물의 보존상태도 대부분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문화재청은 지난달 8일 이 건물을 제758호 등록문화재로 지정했다. 지금은 교양관으로 쓰이는 이 건물은 건축적으로 완결미를 느낄 수 있는 아주 아름다운 건물이다. 좌우 대칭의 붉은 벽돌건물인데 건물의 가장자리와 기단부위 등 주요 포인트에 화강석을 붙여 의장효과를 높였다.
건물 정면 윗부분에 ‘이농(裡農)’이라는 이름이 디자인된 학교 모표(帽標)가 선명하다. 기단은 화강석을 거칠게 다듬어 3단을 붙였고 화란식 벽돌쌓기를 하였다. 창호의 위아래도 화강석을 붙였으며 측면 계단실 부분은 원형창을 두었다.
학교 정원의 남쪽 울타리는 ‘고봉로 1길’과 연접해 있는데, 고봉로 1길은 ‘고봉로’와 ‘중앙로 13길’을 연결한다. 고봉로 1길은 오래 묵은 플라타너스 가로수를 거느리고, 북쪽 학교 정원의 크고 작은 관상수 숲이 만드는 짙은 녹음과 남쪽 실습장의 편백·왕벚나무, 대나무 숲 등의 사이를 미끄러지듯이 가른다.
‘중앙로 13길’쪽으로 난 후문을 통해 학교 정원 안으로 들어가면 세 갈래 길이 정원을 가르며 산 아래쪽으로 흐른다. 오른쪽으로 흘러내리는 길은 50미터 정도는 되는 짧은 길인데, 이 안에는 호랑가시나무와 화살나무가 군락을 이루며 표일한 느낌을 준다.
아래쪽 길 끝에는 가파른 길에 만든 계단 몇 개가 내려가다가 오른쪽으로 꺾어 고봉로 1길과 만난다. ‘중앙로 13길’을 따라 난 울타리 안쪽의 서쪽 길은 향나무와 백일홍, 목련 등 정원수와 회향목으로 경계를 두른 정원 사이를 흘러내려간다.

이 길의 오른쪽에는 학생관이, 그 아래 왼쪽에는 교양관이 있다. 정원의 중심부를 가르는 길은 북쪽으로 가파르게 흘러내리면서 제1·제2 수의학관을 거느리고 오른쪽의 환생대관 등 교사 쪽으로 완만하게 굽어 흐르다가 다시 운동장과 구 시녀제 사이의 북쪽 길로 빠져 정문에 이른다.
8월의 정원 중앙 길에 서면 귀가 먹먹해진다. 당장에 짝짓기를 못하면 혼절할 듯한 매미 울음 소리 탓이다. 지축을 흔드는 이 소리는 한여름의 절정을 말해줄 뿐 아니라 짧은 삶도 본분을 다하기에 덧없지 않다는 자연의 할(喝)이 아닐까 하여 한동안 오감을 열고 압도당하게 된다.

이 정원 길들은 1919년 일본 고교 스모 대회 우승자인 조선사람 김택용의 길이었고, 문학가 한하운의 길이었다. 또 독립운동가 이상운 의사의 길이기도 했다. 한하운 시인의 ‘보리피리’시비와 “제 몸을 썩혀 조국을 소생시키는 씨감자가 되자”던 이상운 의사의 추모비가 이 정원에 있다.
또 서쪽 길과 중앙길 사이에는 이 정원을 보존해야 할 이유를 다음과 같이 한마디로 압축한 개교 환각비가 우뚝 서 있다. ‘상록의 숲 속에서 대방의 신화를 엮으리’. 팔월 열이틀 한 낮, 이 신화의 숲 속에는 인생을 지그시 관조하는 백발의 노옹들 몇이 귀한 녹음의 한때와 일체를 이루고 있다.

개척자와 의인들의 길
 
이리농림학교는 “조선 특수의 영농경작의 새로운 지식과 기능을 가지고 자신이 영농에 종사하면서 지도력을 겸비한 전문 인력이 필요하다”는 일인출신 농장주와 지역 유지들의 뜻에 따라 1922년 4월 총독부가 관립 갑종 5년제 학교로 인가했고 그 해 5월에 개교되었다.
이 학교의 설치 인가와 개교는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이리(익산)지역 유지들의 열정과 치밀한 물밑 작업이 낳은 결과다. 1918년 11월 총독부 학무과 주최 전국 초등학교 교원 만주시찰에 전북 대표단도 참가했다. 이들이 돌아오는 중 총독부가 전국 유일의 관립농림학교를 갑종(5년제)으로 설립하려한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물망에 오른 예정지는 서울·대구·대전·이리.
이 정보를 접한 대장촌 금촌농장의 이마무라(今村一次郞)는 황등 지주이자 도의원이던 가다기리(片桐和三)와 유치방안을 의논했다.
두 사람은 이진호 전북도지사와 마쓰모도(松本) 과장을 만나 지지를 얻어내고 당시 익산군수 노무라(野村淸彬)에게 학교 유치의사를 밝혔다.
설립추진운동의 발기자 대회는 1919년 12월 이리학교조합사무소에서 열렸다. 대회에서는 학교 설치를 위한 희사금 모금, 학교 설립신청을 의결하고 12명의 상무위원을 선출했다. 웅본농장주 구마모토 리헤이(熊本利平) 등 일인출신 농장주와 지역 유지들이었다.
이들은 1921년 총독부에 청원서를 제출했다. 희사금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경제압박 속에서도 15만 원을 모았고 마동에 학교 부지 1만3천여평을 확보했다. 첫 입학시험은 서울 경성중학교(현 서울고), 전주소학교(현 전주풍남초등학교)에서 실시했는데 전국에서 500여 명이 지원했다.
일제시대 5대 농림학교중 하나인 ‘이리농림학교’가 탄생하게 된 비화다. 이리농림을 비롯한 수원농림, 춘천농림, 안동농림, 진주농림 등이 당시를 대표하는 농림학교들이다.

열정과 치열한 노력의 결실

이리농림학교가 익산사람들에게 남긴 보물은 두 가지가 더 있었다. 교정 밖의 남쪽, ‘고봉로 1길’변에 있는 묘포장과 교정의 동쪽 끝인 고봉로와 고봉로 1길이 만나며 직각을 이루는 곳에 있는 시녀제가 그것이다.
묘포장(실습포장)은 학교의 정원과는 또 다른 정취를 자아낸다. 이곳은 서쪽에는 ‘중앙로 13길’변으로 묘목이 자라 형성된 나무 숲이, 북쪽 ‘고봉로 1변’에는 대나무 숲이, 묘포장의 가장자리 안쪽에서 동쪽 이리초등학교변까지는 묘목들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정원을 이룬다.
특히 이 묘포장과 ‘고봉로 1길’사이에는 산책로가 만들어져 있는데, 이 한적한 자연 속을 느리게 걷다 보면 열에 들뜬 일상이 어느 정도는 식는 것을 체험할 수 있다.

이리농림의 동쪽 끝에 있던 시녀제(侍女堤)는 몇 년 전에 메워져 평지가 되었다. 물이 워낙 맑아 하늘에서 옥황상제의 시녀가 내려와 목욕했다는 전설 때문에 붙여진 시녀제가 왜 메워지게 됐는지는 알 수가 없다. 물이 귀한 익산에서 7천여평에 이르는 물 맑은 방죽이 사라졌다는 점을 안타까워 할 뿐이다.
농고 학생들이 시녀제에서 나룻배를 타고 노닐거나, 시녀제 서쪽 소나무 숲 아래 쪽의 너른 뜰에서 소풍을 즐기던 사진들은 소멸된 방죽에 대한 안타까움을 더한다. 전북대와 통합되기 전 익산대학교 측은 평지가 된 시녀제 위에 황금나무와 편백 등 226주이 나무를 식재하고 주차장 등의 각종 편의시설을 갖춘 공원을 조성하기로 했지만 통합 이후 그러한 계획도 온데간데 없어졌다.                                                         

글 공인배 · 사진 송승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