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하나라도 쓰는 과정 그 자체가 아름답고 훌륭하지요.”

이당 송현숙 작가의 ‘붓글씨는 왜 쓰느냐’에 대한 답이다.

그러나 그 말은 ‘붓글씨를 쓴다는 게 왜 아름다운 것인지 무엇이 훌륭하다는 것인지’ 대답보다는 질문에 가깝다.

붓글씨 쓰는 모습을 보여 달라고 부탁해야만 했다.

그가 든 붓이 벼루에 담긴 먹 속으로 잠겨들어 고요히 뒤척인다.

은은한 먹향이 작업실에 가득 퍼진다.

그의 부드러운 손길이 붓을 들어 올려 벼룻가에 벼린다.

붓에서 약간의 먹물이 흘러나왔고, 먹을 머금은 붓이 가지런해졌다.

그의 앞에는 화선지가 놓여있고 그 상단에 문진이 놓여있다.

화선지는 물에 닿으면 녹아버리는 화장지처럼 부드럽다.

그렇기에 수용성이 강하다.

붓에서 먹물이 필요 이상 쏟아지면 번져서 붓선을 잃게 되고, 과도하게 쏟아지면 화선지는 녹아서 찢어지게 된다.

화선지 위에 붓이 닿기 전까지 작가는 호흡을 가다듬고 마음을 벼리며 붓길을 어떻게 낼지를 정한다.

짧은 시간이었다.

어쩌면 그런 과정이 생략됐을지도 모를 만큼 그의 붓은 빠르게 벼루를 떠났다.

하얀 빛 속으로 들어간 붓은 칠흑의 점과 선들을 남기며 흘러간다.

운필에는 망설임이 없다.

붓은 양털로 만들어졌다.

먹물을 머금은 상태에서 꺾이면 원형이 복원되지 않는다.

그래서 마음이 없는 붓(無心筆)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붓은 무수히 꺾였다가 다시 일어서서 점을 찍고 획을 그었지만 부서지지 않는다.

그는 그렇게 10여자를 단숨에 써내려갔다.

그사이에 붓은 머뭇거리지 않았고, 벼루로 되돌아간 적이 없었다.

같은 먹빛이지만 처음의 점획과 마지막의 획은 다른 색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육안으로는 풍부하거나 마른 것으로 구분되지만, 마음의 눈은 미묘하게 다른 먹색들에 사로잡힌다.

그가 말하는 아름다운 과정은 바로 그러한 작가 자신의 붓춤일까.

혹은 작업에 임하는 일련의 과정일까.

그래서 한순간도 방심할 수 없는, 방심이란 존재하지 않는 경지를 훌륭하다 말하는 걸까.

혹은 결과가 무엇이든 자기의 호흡을 고르고 거기에 몰두하는 자체가 아름답고 훌륭하다는 것일까.

그는 일인칭 화법으로 자신의 대답을 부연한다.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않고 성찰하며 살았다는 게 감사하다. 아프지 않고 잘 지냈다는 게 정말 감사하다.”

아침에 도(道)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갈망과 궤를 같이하는 것일까.

그의 붓글씨를 쓰는 행위는 부단한 성찰이었다고 하니.

서화가인 그는 자신을 구도자(求道者)로 규정한다.

매 순간 흩어진 마음을 구하고 자신을 속이지 않기 위한 단속이었다.

그럴 수 있었고 그렇게 살아왔다는 것이 감사하고, 그러한 인고의 세월을 무탈하게 견뎌왔다는 사실이 감사하다는 것이다.

붓, 먹, 벼루, 종이는 구도의 도구였고, 그것들을 사용하는 수행은 자기통제를 전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부에서 일어나는 통제는 ‘비움’ 없이는 불가능하다.

비운다는 것은 가벼워지는 것이고, 누구든지 깃털처럼 가벼워져서 행복하지 않을리 없다.

몰입하여 비우는 행위 그 자체를 ‘아름답다’, ‘훌륭하다’했던 것이리라.

‘성찰’이 붓길을 내고

그가 쓴 글씨는 크기가 고르지 않다. 크거나 작거나 세로로 길거나 가로로 퍼져 있다.

또는 어떤 글자는 굵고 어떤 글자는 가늘다. 한글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그런데도 전체를 보면 정연하다.

글자들이 서로 가깝거나 서로 멀거나 웅크리거나 펼치거나 혹은 기울거나 바르거나 하며 각자의 글씨의 모양을 조화롭게 하는 의취가 이룬 결과다.

그는 자신이 이룬 그러한 조형미를 ‘서예가 지닌 생명력’이라 이른다.

“악보가 없으면 가사일 뿐 악보가 있어야 노래가 되는 것이다”고 글자의 규격과 형태가 일정하지 않은 이유를 설명한다.

그러면서 “그것은 아무나 못하는 일이다”고 한다.

“한 작품 안에서 글자들이 각각 제멋대로인데도 정돈되어 가지런한 작품은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아무리 보아도 질리지 않게 한다. 관람객은 그것을 감상하는 것이다. 하지만 혼동 속에서 질서를 찾아내는 정신을 가지는 그 단계에도 아무나 도달할 수는 없다”고 그는 귀띔하는 것이다.

작가 송현숙은 그보다 더한 경지는 “문자를 이해하고 그것을 발현하는 것”이라고 설파한다.

“글자의 의미가 작가의 정신에 깃들면 작가는 거기에 걸맞은 공간구성을 하게 되고, 그 속에 형이상학이 들어있다”고 안내한다.

특히, 그는 서예가이자 문인화가로서 “공부한 사람은 준비된 것이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한다.

“내면의 아름다움 혹은 굳셈을 작품에 의도한 대로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다.

붓글씨와 문인화는 본디 서화(書畵)라 했으니, 그의 말은 추사 김정희가 말한 ‘문자향서권기(文字香書卷氣)’와 일맥상통하는 것이리라.

“독서를 통한 인격 함양과 그로 인한 문자 향기가 서화에 담겨야 한다”는 추사의 말은 30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모든 서화가의 화두이고 미래에도 그럴 것이다.

추사는 서화가 ‘한 인간의 품격과 향기를 담은 그릇’이라는 정신적 차원의 세계를 가르친 것이다.

그래서 붓글씨는 동양정신의 척추다.

추사가 친구 권도인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을 읽어본다.

“나는 평생 열 개의 벼루를 밑창 내고, 천 자루의 붓을 몽당붓으로 만들었다” 공부하는 사람 서화가 송현숙은 작가로서 걸어 온 45년 세월에 그렇듯 자부심을 갖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그의 문인화는 ‘글씨와 그림은 같다’는 서화동원(書畵同源)의 차원에서 관람되어야 할 것이다.

그가 말하는 “필력이나 필세, 학문을 겸비했던 과거와는 달리 조형에만 치우친 오늘날의 세태”를 감안해서도 그러하다.

그는 “글씨가 그렇듯이 문인화는 일필로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사람이 허리가 굽으면 오래 못 가잖아요. 획에는 시작과 끝이 분명히 있어요. 붓이 바르게 가야 꺾여도 힘을 잃지 않을 수 있어요. 그걸 탄력의 힘이라고 해요.”

결국 ‘붓의 탄력을 얻어야 글씨를 쓸 수 있고 문인화를 칠 수 있다’는 것이다.

문인화를 그릴 때 나뭇가지 하나를 치더라도 한 획으로 치되, 운필에 장애가 없어야 방향을 바꿔도 그 필세를 그대로 유지 할 수 있다는 것인데, 이는 붓을 바로세우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그는 붓을 바로 세워 나아가는 것을 ‘고무줄을 통제하는 원리’라고 한다.

또 붓이 바로서서 나아가는 상태를 ‘바늘로 바위를 뚫어내기’라고 표현한다.

그런 점에서 이당서실을 운영하고 있는 그는 안타까움이 많다.

“요새 사람들은 급해요. 너무 급해요. 난초 하나를 공부해도 기본이 중요한데, 그걸 견디지 못하고 금방 포기하고 도망가 버려요.”

문인화는 일필로 하는 것

서예가 송현숙(72)은 김제에서 태어났다.

1971년부터 이후 수년 동안 서예로 국전에 입선하는 등 탄탄한 실력을 공인받았다. 45년 전 익산에 ‘이당서실(선화로 41길 21-1)’을 꾸린 이래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냈고, 지역 사회와 적극적으로 소통해 왔다.

그는 아버지 강암 송성룡의 영향을 받아 서예인의 길에 접어들게 되었다.

50년 전에는 서단이 매우 보수적이었다. 여성 서예인은 찾아보기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그는 무엇엔가 끌리듯 서예에 입문한 당시를 회상한다.

“아버지가 글씨를 쓰실 때 어깨너머로 배웠지요. 서예에 호기심이 많았던 나는 아버지가 쓰다가 버린 종이를 주워 다락방에서 밤마다 따라 쓰곤 했지요.”

어느 날 아버지는 그가 쓴 글씨를 보고 “이거 누가 썼다냐” 하시더니 “솔찬히 썼다”고 말씀을 하셨다.

평소 칭찬에 인색하던 아버지의 성품으로 볼 때 그것은 극찬이었다.

그는 그 때 아버지로부터 얻은 힘으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아버지는 방목하는 교육 방식이었지만 무심하지는 않았다. 딸이 서예의 길로 들어서자 이당(怡堂)이라는 호를 지어주고 직접 새긴 낙관도 선물로 줬다.

그는 이당(怡堂)의 출전을 논어 자하편(怡怡如也, 화기애애)으로 가늠하고 있다.

공자는 자하의 “어떻게 하면 선비라 할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서로 절절하게 충고하고 격려하며 화기애애 한다면 선비라 할 수 있고, 친구 간에 서로 절절하게 충고하고 격려하며 형제간에 화기애애한 것이 선비다”고 답했다.

송현숙은 그와 같은 아버지의 유지대로 어떤 곳에서든 화기애애한 성품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불혹의 나이에 문인화가로서 지평을 넓혀 온 그는 대부분의 문인화 화제를 한글 시로 쓰고 있는데, 학문을 익히고 한문으로 다져 온 필의가 작품에 스며들어 고결하고 담백한 문인의 기상으로 투영된다.

그가 한문이 아닌 한글을 주요 화제로 삼은 까닭은 더 많은 이들이 글과 그림을 쉽게 즐길 수 있도록 하는 ‘소통’의 목적이 컸기 때문이다.

평단은 그의 문인화에 대해 “한글이 가지는 조형적인 아름다움을 현대적인 서체로 표현하는 면에서 독창성을 확보했다”고 평가한다.

또 평단에 따르면 율동미가 넘치면서도 고결하고 화려하면서도 우아한 그의 작품에는 ‘평안함’이 깊게 배어 있고, 그 안에는 ‘강인함’과 ‘부드러움’, ‘화려함’, ‘소박함’, ‘슬픔’, ‘기쁨’, ‘사랑’, ‘그리움’ 등이 조화를 이루며 작품 안에 녹아들어 있다.

서화가 송현숙은 한평생 ‘글은 곧 사람이다’라는 말을 확인해 오고 있는 것이다.

파격과 균형을 방향성으로 삼고 있는 그의 작품에서 ‘평안한’ 감정의 기운이 배어 나오는 것은 그가 오랜 세월 자신의 삶을 녹여낸 결과물일 것이다.

그가 서예나 문인화에 임하는 마음과 태도는 어떠할까.

그가 4년 전 군산에 있는 이당 미술관 개관기념전에 작품들을 걸면서 내건 타이틀 ‘붓길은 춤을 추고 먹길은 꿈틀거렸네’가 함축하고 있으리라.

붓을 잡는 순간 매번 행복했으며, 그의 내부에서 생동하는 열망은 늘 넘쳐흘러 새로워지고, 그리하여 세월을 비켜 설 수 있었다는 진술이라면 이보다 더 적실할 수 없는 까닭이다.

그가 지역사회를 위해 한 일 가운데 가장 뿌듯해 하는 일은 서예협회와 서가협, 미술협회를 한 동아리로 만든 일이다.

분파된 국내 서단들이 공동 주최하는 전국공모전 ‘마한서예문인화대전’을 익산에 유치한 것이다.

그는 또 익산 문화예술의 거리에서 익산문화관광재단의 행사에 참여한 시민들에게 무료로 가훈을 써 주는 등 재능기부라면 지역 곳곳을 누비고 있다.

그는 또 자신의 문하생들과 함께 1970년대 초 결성한 이연회(전신, 규연회) 활동에도 활발하게 참여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서화에 임하는 태도를 한마디로 말한다면 심즉필경(心織筆耕, 마음으로 베를 짜고 붓으로 농사를 지음)과 같다고 한다.

합창

보름달

마음 없이 살고 싶다

월영풍성

글 공인배·사진 송승욱 기자